이 작품의 분위기는 신선하고 매력적입니다. 캐릭터와 소재들도 기발하지만, 분위기가 무척 끌려요. 무라타 사야카 편의점인간이 떠오릅니다. 편의점 인간의 ‘나’처럼, 충격적인 상황이나 고된 생활에 대한 분노가 결여되어 있고, 한편 인간적으로 단순하고 헌신적인 면을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맹한 여자’, 즉 착해서 멍청해보이는 캐릭터 자체는 흔하지만, 둘러싼 문체가 전혀 다릅니다. 대개의 작품에서는 이런 주인공이 화를 당하더라도, 독자들은 주인공이 괴롭지만 참고 있구나라는 걸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약하고 맹한 주인공이 지금은 당하더라도 나중엔 반전이 이루어질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고요. 그래서 주인공이 지금 속으로 인내하고 있다거나, 아니면 나중에 작가의 의도에 의해 복수가 이루어질 거라는 실마리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작가가 선하여서 그런지(‘맹한’), 글 속에 분노나 복수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신비로운 느낌이 들어요.
이런 분위기의 약점은 주인공에게 격렬한 감정의 기복과 소용돌이가 없으니, 플롯을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미남 안드로이드 집사가 등장합니다. 평행지구에서 갑자기 찾아왔다는데 상관없어요. 달착지근하니까 빨려들어갑니다.
다시 편의점 인간(무라타 사야카)의 얘기를 하자면, 저는 그 작품을 읽었을 때 너무 재밌었지만 한편으로는, 무라타 사야카가 아스퍼거 증후군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순전한 자기 생활을 적어내는 것 외에는 연승하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기형적일 정도의 감정절제가 던져주는 사회정치적 화두는 충격적이지만, 감정이 없으니 드라마를 짜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하지만 작가님은 물론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니고, 진심 선해서 갈등을 배제시키는 분위기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읽는 사람은 편해도 괴로운 사건들을 창작하시는 것이 힘들 것 같아요. 소설은 대부분 갈등의 연속이니까요. 하지만 에필로그로 5년을 건너뛰는 그 사이의 사건들이 너무 궁금합니다. 둘은 계속 사랑했으면 좋겠고, 주인공은 다이어트 따위 없이 계속 춤을 추었으면 좋겠고, 모든 것이 자각몽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승희는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지만, 볼레 덕분에 행복해져서 즐겁게 춤을 추고, 관객들은 ‘쟤 요즘 왜 저래?’ 라고 의아해하면서도 점점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고요. 발레리나치고는 통통하지만 아름다운 승희의 춤이 인기를 끌고, 행복하던 어느날 볼레가 고장이나서 수리를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우주선으로 돌아가거나 동료들을 불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김실장에게 팔아버린 다이아몬드를 되돌려받아야하는데, 나쁜 놈들이 엄청 비싼 값을 불러서 그러면 천만원에 하룻밤만 대여해달라는 식으로…가는 스토리라던가요.
아니면 김실장의 소개로 볼레의 춤과 미모로 유명인이 되어서 승희는 그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박사장은 끊임없이 착취를 하려들고, 김실장이 결국 돈 때문에 배신을 하고, 볼레를 유혹하려는 다른 여자들이 자꾸 나타나는데… 그래서 볼레의 다른 여자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엉뚱한 썸이 있을 때마다 사랑을 나눠서 볼레의 기억을 지워버린다던가.
아니면 어느날 우연히 볼레의 바다 속에 잠긴 우주선으로 찾아갔다가 별 생각없이 볼레를 정기 업데이트 했는데, 지능과 정신연령이 지나치게 상승해서 각종 투자로 떼돈을 벌고 싸움도 잘하는, 유능하지만 약간 재수 없는 성격의 B형 남자가 되어버려서 이걸 다시 다운그레이드 시키려고 애를 쓰는 스토리라던가…
아니면 미남 안드로이드라는건 나의 망상이었고 실은 우리 집에 얹혀살던 병약한 사촌동생이었다…사랑을 나누면 블랙아웃이 오는건 내 자신이다…다 착각이었다…라고 하는건 좀 크리피하네요.
아무튼 작가님. 혼자 살고 살이 찐 퇴역 발레리나를 찾아온 미남 안드로이드 집사라니 완전히 취향 저격인데 좀 더 써주시면 안될까요? ㅋㅋㅋ 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