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말을 해야 할지 존댓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이 글을 지나치게 친근한 어조로 써 버리면 덜 매울 수는 있어도 결국 이도저도 아닌 감상이 나올 것 같아 반말을 합니다. *
오랜만에 브릿G에 돌아와 방황을 하다가 글을 한 편 읽었다.
나는 원래 리뷰를 쓰는 글은 굉장히 열심히 읽는데, 이 글은 비교적 그러지 못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적어도 몇 번 이상은 읽는다, 그게 안 되면 아주 꼼꼼하게라도 읽는다, 이런 원칙이 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 나름대로 변명을 하자면 글 자체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브릿G’라고 하는 장르문학 사이트에서 기대하는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나하나 뜯어서 읽지 못하고 물 흐르듯 쭉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실 좀 힘들었다.
제목에서 밝힌 세 가지가 있다.
환상, 욕망, 재미.
이는 별것이 아니되 별것이다. 나는 장르문학에서 저 세 가지를 기대한다. 원래는 모든 문학에서 기대하나, 불행하게도 어느 순간 ‘순문학’이라고도 불리우는 한국의 문단문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가치가 되어버려서 굳이 장르문학이라고 쓴다.
다음부터는 근거가 살짝 빈약할지도 모르는 나의 몇몇 믿음과 바람이다.
1. 문학은 결국 환상이다.
모든 문학은 결국 환상이다. 실재하는 그 무엇을 모델로 해서 만든다고 하더라도, 결과물에는 작가의 시선이 반드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작가는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감춰야 할 것을 감추며 정교한 허구를 쌓아올린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결과적으로 진정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고 한들,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저 ‘허구를 쌓아올리는’ 솜씨일 것이다.
(굳이 밝히자면, 기왕이면 정교하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거나 만들고 싶다. 괜히 허구에 현실을 끼워넣으며 너는 여기에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환상을 볼 뿐이었고 이제 깨어나서 현실로 돌아가라고 다른 사람 대가리를 박살내는 행위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했다. 적어도 서브컬쳐에서 90년대의 에반게리온 이후 세대라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셈이다. 대가리 박살난 그 오타쿠들, 다 허구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2. 인간이 만드는 모든 유형과 무형의 것은 결국 욕망을 담는다.
욕망이 그리도 나쁜가?
신념을 품는 것도 결국에는 욕망의 하나이다. 내가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행위 중 하나는 욕망을 천시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행위에는 전제가 하나 따르는데, 도덕적 가치와 욕망을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대립항으로 놓는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흔히도 ‘욕망’이라는 단어의 뜻을 구분하지 않는다. 나는 도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징글징글한 짓거리들을 무한히 추구하자며 깃발을 흔들려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을 옹호하려는 게 아닌데, 도덕과 욕망이라는 이분법으로 쉽게 빠지더라.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다.
당신이 강렬하게 바라는 것. 그것을 사랑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3. 모든 문학이 재미있을 수는 없지만, 나는 재미있는 것을 읽고 싶다!
여기는 정말 바람의 영역이라 근거를 댈 수 없지만, 나는 기왕이면 재미있는 것을 읽고 싶어서 장르문학을 읽는다.
스토리텔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장르문학을 써 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쯤이면 내가 문학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책무를 짊어지어야 하며~ 현실과 정합해야 하며~~ 어쩌고저쩌고 아무튼 문학은 고상한 것~~ 운운하는 소리를 참 선택적으로 듣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런 문학도 있다. 모르는 바가 아니며, 많이 읽었고 앞으로도 읽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환상과 욕망과 재미라는 이야기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래서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길게 스토리를 썼지만, 따지고 보면 해리포터는 실재가 아니라 허구라는 소리 아닌가?
이건 내가 너무 납작하게 해석한 것이기는 한데, 솔직히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런 독해밖에 하지 못했다. 만약 작가가 의도한 바가 저것이 아니라면 나는 오독을 한 것이다. 어쩌면 내 독해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그런데 그리핀도르의 후예가 없다는 문단을 굳이 끼워넣은 것을 보면, 나는 역시 작가가 해리포터 생각을 하다가 단편을 썼는데 하필 해리포터를 읽은 사람들의 환상과 욕망과 재미를 적절히 자극하면서도 결말에서는 (즉, 주제의식 자체에서는) 그걸 부정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해리포터가 한국에 출간되었을 때 나는 이미 현실과 허구를 혼동하지 않을 만한 나이였다. 그래도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뒤로 갈수록 재미가 없어져서 그만두기는 했지만 나이가 조금 더 어렸다면 지금의 내 마음속에서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마지막 권은 인간적으로 뺀다 C.S 루이스 나쁜 새… 아니 나쁜 사람아……)가 차지하는 위치로 지금의 해리포터가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 나니아 연대기 첫 번째 권을 읽고 모험을 하기 위해 옷장에 틀어박히던 초등학생이 마법학교에서 입학하라는 편지를 보내기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사람들이 왜 좋아했을까?
재미는 빼자. 재미가 없었다면 사람들이 애초에 그렇게 읽지 않았을 테니까.
리얼리즘이 넘칠 정도로 현실적이고, 사람들이 흔히 욕망의 반대편으로 놓는 ‘도덕’이 넘치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런 것이 없어도 문학은 성립할 수 있다.
환상과 욕망과 재미로 흘러가는 문학이 있다는 믿음, 그리고 환상과 욕망과 재미로도 ‘좋은 문학’이 성립할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을 보여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나는 더는 장르문학 읽다가 작가한테 현실로 돌아가라며 대가리가 깨지고 싶지 않다. 현실은 이야기가 끝나고 내가 알아서 찾아봐도 족하다. 내지는 그런 것을 고급한 예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쓴 다른 문학을 읽겠다.
물론 가장 좋은 문학은 이러는 내 뺨따귀를 짝짝짝 세 번 갈기며 “야! 여기 네가 받아먹을 환상과 욕망과 재미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현실과 진리와 도덕도 있지롱! 이분법 좀 그만 사랑해 멍청아, 세상은 흐릿할 때가 가장 매력적이야!”라고 말하는 것이겠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쓰는데.
이 글에 환상이 없고 욕망이 없고 재미가 없고~ 이런 이야기 아니다.
이 글의 주제의식은 저런 것들을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독해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뭐냐고?
아, 진짜 작가님들!
환상과 욕망과 재미 좀 사랑합시다!
한국에 해리포터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정말로 아이들에게 환상과 욕망과 재미를 허락하기나 했는지 좀 생각해 달라고요!
+ 다음날 새벽 2시 39분에 덧붙임
문제는 이렇다. 어린 시절과 결별해야 진정으로 성장하는 것이고,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것은 사실 허구이며 진짜 삶은 그곳에 있지 않다, 이런 메시지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나와 어른이 된 나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일단 뇌부터가 다르다) 그때 느꼈던 많은 것을 부정해야만 진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그런 메시지를 더는 받고 싶지 않다.
많은 성장 소설이 유년 시기와의 결별을 말한다. 이 소설 또한 결별에 실패한 인물을 다루며 성장하지 못한 비극을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유년 시절에 느꼈던 그 수많은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나이가 차면 허구와 현실 정도는 가릴 줄 안다. 굳이 넌 허구를 좋아했다고 말하며, 그건 환상일 뿐이라서 진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메시지를 줄 필요는 없다.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는 공존하며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씁쓸한 단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