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없는 해변을 산책하는 풍경에 대한 상상 감상

대상작품: 맑은 하늘빛 눈망울 – 1998(작은 상 탐) (작가: 니그라토, 작품정보)
리뷰어: , 17년 4월, 조회 73

아서 클라크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단편에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한다”고 경고하며 우리에게 사랑을 권한다. 내 대답은 “왜죠? 그럴 듯하지만 꼭 그래야 하나요?” 하는 의문이다. 그가 아무리 대작가라 해도 나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내가 스뚜르까츠키 형제의 <해변의 산책>(주로 “노변의 피크닉”으로 번역)을 타르코프스키의 명작 영화 <스토커>를 통해 접하지 않고 아서의 책을 먼저 읽었다면 수긍했을 수도 있다.

또한 타르코프스키의 거장다운 진지한 성찰과 원작에 대한 성실한 재해석,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는 깊이 존중하지만 메시지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인본주의에 근거를 둔 그의 단순하지만 진정한 메시지에 대하여, 나는 진정성 담은 대답으로 NO라고 답한다.

 

나는 오히려 우리가 스뚜르카츠키의 문제와 주제의식을 좀 더 깊이 있게 탐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변의 산책”이란 원작은 “우리 인간이 서로 사랑하며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던져지는 곳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질문을 더 깊고 아프게 파고든다. 나는 그 질문 자체에서  심오한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상상해보게끔 하기 때문이다.

 

어느 무명 작가의 무명 작품 하나를 리뷰 하기 위해, 고전에 속하는 작품을 셋이나 거론했다. 참고 작품들에 대해서 특별한 소개나 해석을 하고 싶지 않다. 대게 심오한 질문이나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작품들은, 참 모순적이게 지극히 단순한 플롯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거론한 세 작품들도 두 세 문장, 아서의 소설 같은 경우엔 한 문장 만으로도 요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무 거친 요약은 오독의 소지가 많고, 내게는 그런 오해를 설명할 능력이 없다

 

여튼 타르코프스키의 대답, 그리고 크게 연관성은 없지만 주제의식에서 같은 맥락의 답을 하는 아서 클라크의 소설도, 이런 신선한 질문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한 답변들이다.

 

이 불우한 무명작가는 “해변의 산책”과 비슷한 질문을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산뜻하고 도발적으로.

 

아직 이문열 작가의 “들소”를 읽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이 작가가 원전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그것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낸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된다고 본다.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비범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표현과, 너무 쉽게 주제의식을 문장에 드러내는 세련되지 못한 구성은 눈에 거슬리는 단점이지만, 나는 sf라는 장르에서 이런 단점이 크게 두드려져야 하는지 의문이다. 당장 아서 클라크의 그 단편만 하더라도, 결코 어느 누구의 관점에서 보아도 뛰어난 문예미는 갖추고 있지 않다. 내가 접한 sf 소설의 “아우라”는 대체로 문체의 아름다움 보단 아이디어의 심원함에서 나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역사의 시초에서 과연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어떻게 발견했을까? 그것이 역사적 차원에서 행복을 줬을까? 줬다면 어느 만큼인지를 이 작가는 질문한다. 아주 도발적인 질문이다. 사랑은 결국 관계 맺음을 발생시키고, 관계란 선택과 배제의 논리에서 작동하고 있음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결국은 진실이다.

 

어쩜 인류가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결국 그 진리란 깊은 슬픔의 정서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끔 들때가 있다. 어쩜 너무 비극적이기에 뿌리치고 있는 건지도. 오랜 거절의 습관을 체험했기 때문에 무의식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지구라는 행성에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도 바다가 있었고, 육지는 있어왔다. 아주 잠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이 행성을 방문해서, 어느 곳에 있는 해변가를 거닐 었다면, 그곳을 그 존재는 어떤 감정을 느끼며 거닐었을까? 그 존재도 사색과 관찰을 했을까? 그 존재를 관찰하는 다른 시선이 있다면 그건 누구의 눈일까?

 

* 아무리 눈감아 줄려고 해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인종들이 진화니 권력에 대해서 토론을 할 정도로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설정은 너무 지나치다.

작가가 작법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화자의 서술과 인물의 대사를 구별해내는 방법을 터득했음 좋겠다.

신선한 주제 의식은 지지하지만 눈 딱감고 넘어가기힘든 한 가지 결점 때문에, 결국엔 한 점을 깍고 만다.

*너무 멋부리는 듯해서 지웠다 다시 쓴다 반복하지만, 그래도 언급은 좀 해두는게, 해적 번역으로 해변의 산책이란 책을해적 문고판 sf 장르 코너에서  본 기억이 분명 있다. 당시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의 기억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속에서 스토커가 언급하는 맷돼지란 인물의 요약된 일대기가 소설의 전반적 플롯과 일치한다. 어렴풋한 기억이라 확실한 윤곽이 떠오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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