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는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다. 공모(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워크인 Walk-in (작가: 리마, 작품정보)
리뷰어: 이야기악마, 20년 4월, 조회 92

지옥의 본질은 영원한 고통이다. 반대 개념으로 생각했을 때 천국의 본질은 행복이 될 것이며 아마도 무한히 긴 우주의 시간을 순간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영원처럼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지옥일까, 천국일까?

워크인의 사회는 그 물음의 단면을 보여준다. 인구감소의 위기를 겪고 있으나 인공자궁에서 아이들은 태어나고 있다. 백업이 되어 있다면 개인은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도 <워크인>하여 클론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지만 덕분에 개인은 최고의 의료 혜택을 받으며 인류는 과거에 겪지 못했던, <역사 속 모든 권력자들의 꿈>인 영생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무한한 생명, 덕분에 받게된 무한한 시간. 그 안에서 인류는 행복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발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실재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그렇게 아름다워보이지 않는다. 개인에게서 <죽음>을 박탈하는 일은 가정에서부터 일어난다. 안나의 아버지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아내와 재회하려고 한다. 재회하려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고 아내를 잃은 슬픔이 그의 병을 키웠으며 이제 그는 자신을 갉아 먹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거부하고 있다. 안나와 한나는 필요하다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를 살릴 준비가 된 자식들이다. <죽음>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며 <죽음>은 가족을 버려두고 떠나는 <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안나는 자신들을 낳고 죽은 어머니에게 <이럴 거면 왜 낳았냐>는 분노를 갖는다. 이 사회에서 죽음은 더 이상 의미가 되지 못하는 <죄>일 뿐임을 깨닫는 순간 독자들은 놀라게 된다.

또한 죽음이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를 유지하는 부속품이며, 언제든 이용될 수 있는 자원에 불과하게 된다. CPC는 인간을 새로 만드는 기술에 취해있을 뿐, 클론이 겪게 되는 <정신적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다. 여러 번의 워크인을 경험하는 이들은 죽음을 경시하고 있고, 스내치로 인한 강력사건이 증가하고 있으며 영혼 없이 태어나는 클론들은 반사회적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고 있다. 그러나 CPC는 사실을 은폐하는데 여념이 없다. 새 클론들이 태어나는 인공 자궁에 호르몬을 주입하기 위해 살아있는 클론들을 사용하는 모습은 <자원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죽음을 잊어버린 인간들에게 연민은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회는 유토피아를 표방하지만 결국 유토피아의 허상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자원으로 쓴다는 점에서 <인간이 건전지로 사용되는 매트릭스>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래서 <환생>에 대한 접근이 무너진 유토피아의 새로운 대안이 될 만하다. 환생은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환생을 목격하고 인정하는 순간 개인과 사회는 다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떠났지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죽음으로 상처받은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이 된다. 사회는 영생을 강요할 수 없으며 <죽음>의 권리를 박탈할 수 없다. 그러니 안나와 한나가 극 중 <환생>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 것은 무너진 유토피아를 대표해 새 희망을 찾는 탐색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 앞서 말했던 <지상에서 영원처럼 사는 것>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CPC가 만들어낸 세상이 분명한 답을 준다. <죽음>으로부터 도피한 인간들이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영원히 살아간다면 그 사회는 지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유토피아는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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