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경 작가님과의 두번째 만남입니다. 처음은 SF 소설 피조물 콤플렉스였구요. 이번엔 호러 소설이에요. Bloody Valentine. 궁금한게 원래 SF, 호러, 판타지 작가님들은 장르 구분없이 다중 영역을 아우르는 편이신가요? 얼마전에 리처드 매시슨 단편모음집(현대문학)을 읽었는데 매시슨도 장르 복합적으로 소설을 써서 신기하다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요. 이일경 작가님도 계정의 작품들을 보면 SF만 쓰시는 게 아니라 호러,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로 각계 장르가 포진해 있습니다. 불만은 0.1도 없고요. 제 입맛대로 골라 읽을 수 있어 무한 감사하다는 그런 얘기에요. 실은 호러 빼고는 다 좋아하거든요. 근데 이번엔 왜 호러를 골랐는지 스스로도 이해불가 ㅎㅎ
신이 현신한 대한민국. 생각키로 그런 세상이 오면 전쟁은 없어지고요. 다툼은 사그라들고요. 미움은 배척되고요. 사랑이 넘쳐나며 인류는 평화의 길로 구제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 모습을 드러낸 신은 우리 인간들이 예상하던 그런 모습 그런 가치관 그런 미래안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지옥이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이겠구나 싶을만큼 우리 세상은 신으로 인해 오히려 엉망진창이 되어버려요.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 직접 하명하시길 성스러운 땅에 불신자는 필요없으므로 모조리 처단하라시네요. 천국행과 지옥행의 길을 맨눈으로 보여주는 쇼도 벌리니 광신도가 아니라도 제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신을 믿는 자들이 믿지 못하는 자들보다 더욱 빨리 미쳐버린 것도 이해가 될 지경입니다. 천국에 임하고픈 욕망이 더욱 컸을테니까요. 거리 곳곳에 불신자들의 피가 쏟아집니다. 대량학살입니다. 신이 몸소 임하신 바 국가의 힘도 법률의 힘도 사라져버리고 신의 지지 아래 거국적으로 행해진 핏빛 행렬 속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길들이 하늘 가득 빛을 뿜었을 모습을 상상합니다. 호러도 이런 호러가 없네요ㅠㅠ 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는 배신감으로 치떨 수도 없습니다. 모든 이를 굽어살피는 신이 번갯불로 지지는 천벌도 직접 내리는 세상이니까요.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짧은 단편을 내내 이럴 수가 하면서 기이한 분위기에 흠뻑 빠져 읽었습니다. 천국으로 가기 위해 이웃 여자를 죽인 아버지. 불신자인 그의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목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신자에게 찔려 사망에 이릅니다. 아버지, 천국에서 홀로 행복하십니까?
화자인 혁진은 신과 신자들에 대한 분노로 들끓는 가슴을 부여잡고 세상을 관찰하며 목격한 바를 전달합니다. 자신을 죽이라고 명명하는 신에 대항할수도 그런 신을 믿을 수도 없는 세상은 그러나 어째서 이다지도 아름다운지. 노을을 밀며 올라오는 검보라빛 하늘 밑을 걸어가는 그의 뒤로 흩날리는 장미꽃잎이 남기는 잔상이 아득하고 씁쓸합니다. 편협한 신에 맞서는 너그러운 신의 재림이 이어지면 좋겠지만 그럼 지금과 같은 여운은 없겠지요? 알맞은 분량, 알맞은 여운으로 독자의 가슴을 공포로 물들이는 Bloody Valentine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