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이었는데 하나만 남았다 비평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넷이 있었다. (작가: 이시우, 작품정보)
리뷰어: 후안, 20년 3월, 조회 264

[넷이 있었다]는 이시우 작가님의 오랜만 신작입니다.

브릿G에서 호러 장르를 대표하는 작가님들 중 하나로, 약간은 진중하고 서늘한 특유의 문장과 분위기로 훌륭한 작품을 많이 쓰셨죠.

적당한 분량의 단편이지만, 잔혹한 장면 없이도 서서히 밀려드는 그 압박감이 상당합니다.

천천히 읽는 것을 권합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일인칭 시점 화자의 독백입니다.

일인칭 시점의 글은 양날의 검입니다. 쓰기가 매우 어렵지만, 그만큼 몰입감이 좋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화자의 독백, 혹은 변명인데요. (여기서 변명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밑에서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작중 화자는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이 있는 네 가족의 가장입니다. 즉, 넷이 있었다는 제목은 화자의 가족, 그리고 화자가 목격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의 수를 중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넷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죠. 일반적인 가정을 생각하면 보통 우리는 단란한 네 가족을 떠올립니다. 아빠, 엄마, 아들, 딸. 보편적인 가정이죠. 또한, 숫자 4의 의미도 있죠. 숫자 4는 그 음차 때문에 죽을 死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화자의 독백은 처음 아파트 맞은편 동 베란다에서 목격하는 이상한 넷의 존재부터 시작합니다. 정확히는 똑같은 얼굴을 한 네 명의 ‘남자’입니다. (왜 남자였는지 또한 밑에서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아들과 함께 목격했지만, 화자는 처음에 ‘못 본 척’ 합니다. 이후 넷에서 셋으로, 셋에서 둘로 점점 줄어드는 존재들과 함께 화자의 가족, 딸과 아내가 다른 이들로 바뀌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바로 그 네 명의 남자입니다.)

결과는 화자의 끔찍한 – 명확히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작품의 진행과 화자의 독백을 보면 화자가 모든 가족을 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사건에 대한 고백과 변명으로 끝나죠.

 

강탈자에 대한 호러 소설이다.

 

이 작품은 모호한 성격이라 읽는 이들의 판단으로 그 장르적 성격이 달라집니다. 오컬트 요소가 포함된 미지의 존재들 침입 강탈 호러로 볼 수도 있겠죠. 분명 작중에서도 그런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린 딸의 모든 걸 아는 듯한 대화나, 아내의 변화 등은 신체 강탈자 장르물의 좋은 예입니다. 넷에서 셋으로, 셋에서 둘로 점점 줄어드는 ‘남자’들과 그에 맞추어 변해가는 딸과 아내를 대비시켜 알 수 없는 존재가 가정을 침입했고, 모든 걸 아는 나는 이런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희들은 어차피 내 고백 따위 믿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판단에 맡긴다는 열린 결말까지. 신체 강탈자 장르는 음모론이 주 소재입니다. 나는 알지만, 모두는 모른 다와 누구도 믿지 못한다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거의 필수로 들어가죠. 대부분은 이 느낌으로 작품을 감상했을 것입니다.

 

환자의 고백이다.

 

하지만 다른 장르로 볼까요. 심리 물입니다. 우리는 작품 내내 화자의 주장만 듣습니다. 즉, 화자의 이야기를 듣는 처지입니다. 이것은 화자가 이끄는 흐름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정신과 상담을 받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 같지 않나요? 읽는 독자들은 의사,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이는 환자인 거죠. 이런 의미로 읽어본다면 독자는 화자의 정신 상태를 분석해보는 의사의 입장이 되겠죠. 자, 저 역시 이런 방식으로 다르게 이입해 읽어봤습니다. 그러니까 가볍게 봤다면 놓쳤을 부분들이 몇 가지 보이더군요. 대충 몇 가지 나열해 보겠습니다.

 

  1. 처음에 네 명의 남자를 못 본 척했다.

아파트 맞은편 동의 베란다에 서 있던 네 명의 남자를 목격한 화자는 말 그대로 못 본 척 넘깁니다. 하지만 독백에서 화자는 그들의 복장과 얼굴까지 모두 상세히 봤습니다. 그렇다면 왜 못 본 척한 걸까요?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이라고 봅니다.

사실 아파트와 아파트는 거리가 꽤 될 텐데 화자는 이미 그들의 얼굴이 다 똑같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작중에서 남자들의 얼굴을 묘사하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작품을 읽어보면 그다지 화목한 가정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들은 전형적인 사춘기, 아내는 작중 대부분 불만에 가득 차 있는 행동(친지와 통화하며 하소연을 한다던가)을 보입니다. 화자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딸에 대한 기억은 의미 없는 대화를 폭격하는 철없는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에 대한 애정 표현이 없습니다. 지친 가장입니다.

왜 남자일까요. 화자는 넷의 남자라고 명확히 표현합니다. 그리고 모두 검은 옷을 입었죠. 그들의 얼굴을 알지만, 표현은 전무합니다. 저는 이렇게 분석해봤습니다.

네 명의 남자들, 그들의 얼굴은 바로 화자 자신이었다.

2. 단지 내에서 걸어오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화자는 그들의 수가 넷에서 셋으로 줄어든 걸 목격하고, 한 명이 맞은편에서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죠. 하지만 아파트 단지 내에서 걷는 이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고 알 수 있는 건 매의 눈이 아니면 모르겠죠. 즉,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자동차가 덮칩니다. 역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죠. 여기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시점에, 남자의 표정을 보며 화자는 뭔가를 추측하는데, 그 의미는 비웃음, 슬픔, 경멸입니다.

위에서 이들의 존재가 화자를 투영하는 존재라고 가정할 때, 이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자신이 보이는(화자는 그들을 보며 두려워하고, 표정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을 화자로 대입해보면, 자신이 가족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가로 전환됩니다.) 부분이 비웃음, 슬픔, 경멸이거든요. 즉 가정에서 화자의 위치는 비웃음, 슬픔, 경멸입니다.

이미 화자는 정신적으로 붕괴하고 있었고,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3. 딸이 모든 걸 알고 있다.

불가능합니다. 딸이 그들의 존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화자의 추측일 뿐, 목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넷에서 셋으로 줄며 하나가 걸어오다가 사라졌는데, 이후 딸이 변했다는 화자의 결론일 뿐입니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저 수십 년 잠자리를 같이하던 이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식으로 화자는 아내가 아니다로 단정해 버립니다. 뭔가 굉장히 불안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는데, 화자는 자신이 결정한 것을 토대로 모두를 판단하고, 다른 이들이라 결론 짓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죠.

환각과 환청, 자신이 들리고 보는 것에 대한 신뢰.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나만의 고통.

바로 전형적인 조현병의 증상입니다.

 

화자는 조현병 환자이며, 환각과 환청에 시달려 가족 모두를 살해했다.

 

지친 가장, 그런데도 의지할 수 없는 가족들. 비웃음과 슬픔, 경멸에 대한 분노. 점차 무너지던 화자는 자신을 투영한 네 명의 ‘남자’들이 가정으로 침투하여 모든 걸 망쳐버리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 믿었던 아들 (작중에서 딸과 아내는 침투한 이들이라 판단하지만, 끝까지 아들에게는 그런 표현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를 보냈다는 표현을 보면, 유일하게 화자의 생각과 공유하는 존재로 방어적 기질로 도피하려 합니다. 작중 많은 대화를 보면 화자와 아들의 유대감이 큽니다. 네 명의 남자를 처음 본 것도 아들이죠. 그리고 결말 또한, 아들이 화자에게 원망하는 표현을 보입니다. 왜 그랬어 하는) 역시 화자는 결국 끝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은, 당신의 가정이 평안하길 빈다고 마무리하죠.

 

많은 사회 뉴스를 보면, 일가족 자살이나 살해사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기사를 보며 그저 욕을 내뱉고 넘기기 일쑤지만, 사실 그들이 어떤 사이였는지, 혹은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미 가족에 대한 기준은 무너진 상황입니다.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자식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뿐,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단란한 가정’의 기준인, 넷이 있었다.

글쎄요. 많은 이들이 가정을 꾸리며 살지만, 넷이었지만 하나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가장이든, 아내든, 아들이든, 딸인지든 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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