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좀비가 눈길을 끈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좀비는 인간과 밀접한 존재로 부각되었다. 사실 좀비 자체를 보면 그다지 큰 능력이 있지 않다. 세계를 위기에서 구하는 초능력자처럼 월등한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이보그나 외계인처럼 육해공을 저어 다니는 능력이 있지도 않다. 그들은 바이러스때문에 죽었다 다시 살아난 시체에 불과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육신이 온전치 못해 어정쩡하게 걸어다니며 마주치는 생명체를 먹어치우는 게 전부이다. 사람의 형태를 잃어버린 그들에게 남은 건 식욕과 폭력성뿐이었다.
<아내의 좀비>는 그런 점에서 다른 좀비물과 다르다. 여기에 나오는 ‘나’는 자신이 좀비인줄 모르고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 때문에 척추를 다친 아내가 좀비에게 희생되지 않도록 그리고 자살하지 못하게 보호와 감시를 멈추지 않는다.
부부란 가장 가까우면서 먼 사이다. 가족이지만 피를 나눈 혈육은 아니어서 언제든지 남이 될 수 있는 관계이다. 사랑이 끝난 부부가 서로를 헐뜯거나 죽이는 것을 우리는 이미 드물지 않게 봐왔다. 심장이 뛰는 인간들도 그러한대 이미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좀비는 오죽할까! 이전의 작품에서 그려진 좀비는 살아 생전의 감정을 모두 잊고 오로지 살육의 대상으로만 인간을 대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나’는 좀비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구하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그건 필시 아내를 향한 사랑이 좀비가 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내용으로 짐작컨대 아마 작가는 영원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말이 급작스러운 것, 사건의 서술이 남편위주로 흐른 것, 남편 외 다른 캐릭터의 모습이 흐린 이유가 거기서 온 것 같다.
소설은 주인공과 주변 인물이 상호보완하며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문학이다. 작품을 쓰다보면 작가가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말을 많이 한다. 집필 전 구상한 주제를 놓쳐 우왕좌왕 전개하는 것도 문제지만, 작가의 구상을 고집해 무리하게 전개하는 것도 좋지 않다. 나는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지루할 틈없이 내내 긴장감을 안기다 갑자기 느슨하게 놓아버린 결말이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러물로만 치닫던 좀비장르가 새롭게 진화하는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영화 <웜바디스>처럼 상식으로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좀비가 다시 사람이 되고 사랑의 결실을 이루길 꿈꾸는 게 인간의 본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