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은 울려퍼졌으나 벼락은 치지 않았다. 비도 그쳤다.-<매듭을 푸는 방법>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매듭을 푸는 방법 (작가: 이루엘, 작품정보)
리뷰어: 신현실주의, 20년 3월, 조회 82

저는 혼돈을 참 좋아합니다. 정확히는 다가오는 거대한 혼돈 앞에서, 세상을 지키기 위해 한줌의 힘으로 발악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전 희대의 똥겜이라고 욕먹는 아틸라 토탈워 서로마 레전더리를 470시간 정도 플레이했습니다. 나머지 30시간은 동로마 레전더리였구요. 그래서 눈 속의 독수리도 좋아합니다. 워해머 판타지의 엔드타임도 좋아하고요. 팔봉산 트루 워로드 스카스닉 빼먹은 건 좀 아쉽지만. 하여튼, 여기서 대충 감을 잡으셨겠지만, 지금 소개하려는 글도 이런 내용입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이루엘님의 매듭을 푸는 방법, 지금 시작합니다.

 

만일 파도가 몰려온다면.

 

작중 세계는 매우 불안정합니다. 주기적으로 망자라고 불리는 괴물들의 신이 탄생하고, 일종의 자살특공대를 보내서 겨우 억제하고 있는 형국입니다.(<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상황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심지어는 이 자살특공대조차 실패할 뻔한 적이 있었고요. 한편으로는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지키는 자살특공대의 육성과 운영은 전적으로 종교 세력만 주관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인간들끼리의 정치적 분쟁 때문입니다. 게다가 종교 세력도 무언가 사회 개혁적, 복지적 성격은 없고, 군국주의적이며 기존 계급체제를 옹호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구리구리하지요. 부패한 맹독충 아조씨들이 튀어나와서 우헤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인물들인 베네딕토 신부나 라파엘라 수녀, 본티오 주교나 테렌시오 대주교 등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대한 시선으로 볼 때, 선한 편이거든요.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기계적 공리주의로 무장한 고참 영업사원들이라는 게 정확한 평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의 자식인지라 서서히 지치고 닳아가면서, 회의를 느끼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면 이들의 반대편(대적자들)이 선or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대적자들 모두 저마다 합당한 이유와 명분을 갖추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선과 악이라고 명확하게 규정짓기 어려운 세력들이 만수산 칡덩굴처럼 얽힌 이야기. 듣기만 해도 흥미진진하면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천둥은 울렸으나 벼락은 치지 않았다. 비도 그쳤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야기가 중반부터 급격하게 압축된다는 점입니다. 충분히 시간을 더 들여서 풀었어야 할 과정들이 생략되고 결과로만 제시됩니다. 최소한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3화에서 5화 정도는 더 추가했어야 매끄러워졌을 겁니다. 베네딕토 신부의 변화가 특히 급격한데, 마지막 2화에서는 거의 저글링에서 뮤탈리스크급의 변화로 보일 지경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후속편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니면 쓰다가 지쳐서 놓아버리신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자세히 말하자면, 대략적으로 3막까지 시작한 이야기들은 제법 있는데, 그 이야기들이 5막까지 가며 끝나는 과정이 허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것은 뒤늦게 집어넣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지배계층 이야기를 들 수 있는데, 초반부에 간접적으로 잠깐 나왔다가 후반에 급격한 행동요인으로 상승합니다.

 

물론 뜬금포는 아닙니다, 뜬금포는 아닌데… 독자의 입장에서 진행에 합의가 안 된다고 할까요. 분명 이 글은 멸망과 딜레마 문제를 놓고 고통 받으며 고민하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글일 텐데, 배경적 요소로 간접적으로만 등장하고 직접적 부각되거나 상징되지도 않은 구체제 타파를 노골적으로 나오니, 당황스럽습니다.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신이라는 존재가 더 익숙한데, 이 글에서 고유한 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해석도 상당히 늦게 설명될뿐더러 묘하게 우선순위가 뒤로 밀립니다.

 

이런 불편한 감정들의 원인을 짚어보면, 작중 여러 전환이(그게 서사가 되었던 인물이 되었던) 독자가 공감할 만큼 충분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동의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비행기로 따지자면, 고도를 급격하게 올리다가 실속에 빠진 거지요.

 

커다란 반전도 좀 불만족스럽습니다만, 이건 개인적인 호불호의 영역인지라 묻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자잘한 것으로는, 멸망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논하면서 마무리하는 이야기의 스케일은 작았다는 점, 본티오나 테렌시오 등 성격이나 대사, 유형이 비슷한 캐릭터들만이 나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종교가 주연들의 주요 속성이지만 거의 부각이 안 되는 점도 언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정말로 아무런 향도 맛도 없거든요. 이런 전개라면, 굳이 종교가 없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기실 종교인들이면서 지나칠 정도로 이성, 합리를 강조하는 것이 미스매치에 가까운 것 같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마지막 화를 읽고, 다시 돌아보면서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습니다. 중반까지는 좋았거든요. 삶에 찌든 직장인 같아서 공감요소가 있었던 현실감 있는 캐릭터들. 다가오는 멸망이라던가, 등등. 끝까지 잘 이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중간에 퍼진 것이 마치 <달을 먹다>를 읽었을 때와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도 작가 분께서 후속편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니, 이 아쉬움이 다음 이야기에서 잘 풀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분에게 추천

 

  1. 묵시록적인 분위기, 딜레마가 주요한 주제인 이야기를 선호.
  2. 클래식한 스타일의 문장을 구사하는 글을 선호.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