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항상 유토피아를 꿈꿔왔다. 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꿈을 간직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희망을 꿈꿀 수 있다. 현실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대안으로 유토피아가 제시되고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유토피아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인류는 발전해왔다. 앞으로도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진보해나갈 것이다. 이상향은 혼자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에게 강요하면서 달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희생하면서 또, 자발적으로 희생할 용의가 있는 이들이 모여 거대한 결속을 이루면서 이들이 함께 꾸는 꿈은 유토피아가 된다.
서위 작가의 <쥐들의 세상>은 절망에 쌓여 있는 어두운 세상의 일면을 그리고 있다. 물론 각자의 상황과 가치관에 따라 절망이기도 희망이기도 한 것이 세상이다. 소설 속 한 쌍의 연인도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한 사람을 감히 안다고 말하는 것, 또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단편적인 생각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비극적인 이야기의 결말을 보며 어쩌면 더 큰 결속을 위해서는 기억과 이해 보다 망각과 용서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의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새로운 존재방식과 이상향에 대한 가능성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함께 하는 삶을 위한 자발적 희생과 기억을 이겨낸 용서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똑같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고독 속에서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누군가와 함께 바라보는 것은 분명 다를 것이므로… 저 빛나는 한줄기 달빛을 더러운 쥐들이 우글거리는 하수구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빛’이 아닌 자신을 감시하는 ‘절망의 빛’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녀의 상황이 아프게 다가온다. 행복했던 기억이 있고, 또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들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힘을 내줄 수는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