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를 읽고 좋았던 점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화엄사 들매화는 끝내 흐드러지고 (작가: 문녹주, 작품정보)
리뷰어: 그린레보, 20년 2월, 조회 114

우선 리뷰 제목이 볼품없어서 죄송합니다. 제목처럼 이 글을 읽고 ‘좋은 글이구나~’라고 느꼈던 점을 간략하게나마 더듬어볼까 합니다.

이 작품의 ‘좋은 점’은 그대로 요즘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는 소설(이라고 내가 파악하는 것)의 특질과도 이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1) 장소 리얼리즘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에 대한 세부 리얼리티가 잘 드러나는 점. 이와 같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사실성은 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물의 동선 세부가 충실해서 확보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소설들에서 개성 강한 ‘묘사’는 오히려 가독성을 해치는 요소가 되는 것 같더군요. 묘사를 자제하고 리얼하게 느끼게 만드는 동시에 너무 건조하거나 가볍지 않으려면 상당히 언어감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2) 관료제 리얼리즘

장강명 작가가 말했던 ‘월급 사실주의(리얼리즘)’의 일부로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 서사전략이라 해야 하나.. 세계관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정부 부처의 말단, 주인공과 대립하는 ‘화엄사’ 측도 거대조직으로서 관료주의로 움직이는 면이 있고요. 또한 인물들 간의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분리되어서 ‘사적으로 친밀하지만 공적으로는 대립하는’ 관계를 그리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 역시 관료제 속 인간관계를 그리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되네요. 월급사실주의에 관해선 이후에도 따로 항목으로 빼겠습니다만.

3) 패밀리 이슈

이걸 굳이 ‘장점’으로 넣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은 가족간 갈등에 쉽게 몰입하는 것 같아요. 주로 딸과 어머니의 갈등, 그 배후엔 무책임한 아버지가 있군요. 주인공 선재는 공적 갈등과 사적 갈등 양면에서 고통받는데 가족 문제가 공적 임무와 얽혀 있다는 점이 탁월했습니다.

4) 월급 사실주의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꾸역꾸역 밥을 먹어야 하는 보통 사람들의 세계관이네요. 직을 잃는 게 가장 큰 걱정거리인 사람들의 현실감각이 특히 인물조형과 배치에서 잘 느껴지는 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처하는 난제는 외부세력과의 교섭이지만, 거기 걸리는 스트레스의 레벨을 극한으로 올리는 게 ‘나쁜 상사’라는 것도 재밌어요. 인물과 세력 들이 각자의 명분과 실리에 따라 움직이는 가운데, 명확한 악역 역할을 맡은 나쁜 상사. 완전히 직장인의 감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공적 대립 대상인 화엄사측과는 유대관계가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네요.

 

이상에서 항목을 나눠 이야기했지만 그밖의 감상을 풀자면,

SF 작품으로서의 아이디어도 상당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SF에 조예가 잘 없어놔서 이런 판단을 해도 괜찮은가 싶지만… 기후변화는 지금 당장의 현실인데, 그것이 진행되었을 경우 미래에 있을 법한 상징적 사건을 무척 잘 캐치하신 것 같습니다. 화엄사의 유서 깊은 매화를 옮겨 심어야 한다, 이 설정이 이미 갈등과 드라마를 내포하고 있네요.

기술로 인한 사회변화를 외삽하면서, 주제적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은 역사와 생활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금 보수적인 느낌도 들지만 이런 면이 ‘사실적’이기도 합니다. 건전하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인상깊고 궁금하기도 한 점은 마지막에 반달곰과 마주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야기상으로는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장면이지만 그 자리에 배치되었다는 게 상징적으로 느껴졌어요. 감정의 동요에 관한 묘사는 여전히 억제되어 있지만 산속에서 곰을 마주친다는 일상적이지 않은 일에 관한 경이, 아름다움이 느껴짐과 더불어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생태주의적인 관점과, 일상인의 처세술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곰의 출현은 인간끼리 인위로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지만 결국 역사와 환경을 공유하는 다른 생명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주는데, 큰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그 존재에 관한 주인공들의 대처가 숨을 죽이고 지나가길 가만히 기다린다는 거니까요. 이 ‘가만히 기다리기’는 특히 직장인 처세술로서 어디선가 많이 본 문구와 부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손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지만요. 이때의 주인공은 차라리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태도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 ‘노력’에 대한 적당한 거리두기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이상이 작품을 읽고 생각을 정리해본 내용입니다. 사견뿐이라, 폐가 되지나 않으면 좋겠네요. 오독한 점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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