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마음이 사라지면 그 관계도 끝나고 만다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주 곱씹어보게 된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속한 세계를 향한 호기심은 나날이 빛이 바랜다. 가끔 무료하게 눈알을 굴리며 멍하게 있을 때면 머릿속에 든 뭔가가 일찌감치 습기를 잃고 말라 겨울철 낙엽 마냥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이런 상태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가장 감흥 없이 빠져나오곤 하던 텍스트 장르를 꼽는다면 내겐 단연 판타지다. 좀 더 세부적으로 편을 갈라보자면 로맨스. 북극의 빙하가 콸콸 녹아내리고 온지구가 이상기후로 멸망할 위기에 처한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쥐어짜, 다양한 방법으로 멸망하는 세계를 그린 아포칼립스 세계관 영화를 주구장창 보다 갈(???) 지언정 ‘판타지 로맨스’는 같은 상황에서 내가 가장 읽지 않을 종류의 이야기가 되었다.
대신 아주 가끔이지만 이렇게 거의 닫히다시피 한 문 틈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또아리를 트는 이야기도 있다. ‘라비린스’가 내겐 그런 이야기였다. 문득 길을 가다 낯선 향수 냄새를 스칠 때처럼 갑작스레 심장이 두근두근 빨리 뛰고 쉬이 가시지 않는 여운을 남기는 로맨스. 가장 최근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낀 건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 주인공 라라진을 처음 만났을 때니까 이것도 벌써 최소 1-2년 전쯤의 일이다. 옛날 사람들(?)이 언젠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같은 걸 처음 읽고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하는 상상도 살짝 해보았다.
’라비린스’는 그 속에서 인물들이 겪는 다양한 사건사고에 비하면 그걸 전하는 방식은 상대적으로 감정선을 꾹꾹 잘 눌러담은 탓인지 고요하고 정연하다. 음악을 ‘쉽게’ 들리도록 만들고 연주하는 대가들의 ‘어려운’ 노고가 그러하듯 이 이야기 역시 독자들이 쉽게 읽고 빠져들 수 있도록 쓰면서 들인 공이 어마어마함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아델과 안나가 함께 춤을 추던 때를 고르고 싶은데 소설 속에서 두 사람은 무도회장 바깥에서 몰래 손을 맞잡았지만, 영화 <크림슨 피크>의 한 장면처럼 멋들어진 연회복을 차려입고 한 손에 든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만 같은 촛불처럼 일렁이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두 사람의 모습을 아주 쉽게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상투적이지만 가슴 한 켠이 찡하도록 너무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 우선,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 속 마지막 문장이자 주인공 그레이스가 자신의 인생에 남다른 의미로 남은 두 여자와 자신의 상징을 자수로 새기며 한 말, “그러면 우리 셋이 하나가 될 수 있겠죠”가 ‘그레이스’를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로 매듭지은 것과 반대로 ‘라비린스’가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을 수 있게 되어 좋았고, 두 번째로 살면서 이런 류의 감상이나 비유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리뷰어의 감상이니 믿고 읽어도 좋다는 어쭙잖은 어필도 (굳이) 한 번 해본다.
판타지와 로맨스를 믿지 않게 된 건 어쩌면 수없이 마주한 그에 반하는 현실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그리며 바라보는, 별이 가득 수 놓인 까만 밤하늘 대신 예상치 못하게 입원실의 낮은 보호자 침대에 누워 자그마한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며 무료하게 보내게 된 어느 하루 끝에는 이런 꿈결 같이 손에 닿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고운 빛깔의 이야기가 깊은 위안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