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지금 눈 앞의 사람에게 잘해 주어라, 모두들 힘겨운 도전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이니까. 뭐 이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난 그 말을 모두의 대박은 모두의 쪽박이다, 같은 말로 해석했다. 나는 공교육 속에 깊이 녹아든 상대평가 시스템의 희생양으로 자라난 게 분명하다. 기껏해야 하는 생각이라고는 사람 힘든 건 매한가지니 우는 소리 내어 봤자다, 같은 것뿐이니.
그에 비하면 작가가 설파하는 가치는 마더 테레사의 마음씨에 비할 곧고 고운 성격을 가졌다. 한 해가 가고 또 다른 해의 첫 하루, 날이 밝아오는 가운데 편의점 새벽타임 근무를 하며 취객을 상대하면서도 “모든 이에게 닿는 온기”를 바라는 그 짐작도 하기 어려운 깜냥이란.
난생처음 해본 아르바이트가 편의점 캐셔였다. 한가로이 카운터에 앉아있을 때면 의미있는 알맹이라곤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시간팔이의 신세를 절로 한탄하게 된다. 그리곤 다짐했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경력이든 뭐든 쌓이면 언젠가는 시간을 팔지 않고 살아있는 느낌을 몸으로 고스란히 느끼며 사는 그런 일을 해야지, 하고. 다른 이들의 사정이야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그 이후 경험한 건 여전히 시간팔이 노동자의 고뇌였다. 그리고 편의점이란 공간 안에서 그 기억은 미적지근하게 큼큼 코 끝을 파고드는 컵라면 냄새와 어우러져 새겨진다. 이런 직군의 노동자들은 주로 남들 일할 때 같이 일하고, 특히 남들이 놀 때도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젠 그 ‘남들’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추석, 설날, 기타 등등의 빨간날을 아르바이트로 보내고 나면, 약간의 돈과 어차피 그리 의미있게 쓰지도 않았을 시간이라는 애매한 위안 정도가 남는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 쉽게도 잠식된다. 매일매일 새로이 밝아오는 해가 두텁게 남은 공책 빈 곳처럼 무감하게 흘러가듯이.
그러니 남들과 뭐 그리 대단하게 다르게 살 수 없을 거라면, 때론 심지어 그보다 더 뒤지는 감정에 사로잡혀 휘청거릴 때라면, 차라리 화자처럼 모두가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겨울이라는 바람이라도 보태는 것이 훨씬 긍정적이고도 생산적인 방향이 될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게다가 바야흐로 2020년에 돌입했으니 이젠 추위 못지 않게 극심한 더위와 이상기후에 관한 염려도 덧붙여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런 도전이 다소 시시하게 느껴질진 몰라도 생각보다 쉽진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경멸스러우면서도 가여운 삶 속에 약간의 안녕을 빌어주는 일이란 그 삶 자체만큼이나 지난하고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분명 의미는 있다.
온난화 가스 역시 처음부터 이 정도 규모의 온기로 시작하진 않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