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첫 번째 사건의 설정 상에 다소 자극적인 면이 있기는 했으나, 있을 법한 설정을 뻔하지 않게 풀어나가는 전개와 구성이 재밌어서 다음 사건을 기다리며 두근두근 읽어가던 찰나에 최신 회차까지 닿고 말아 좀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범인을 알고 시작하는 수사라는 지점도 재밌었고, WP; World Painters라는 조직 자체의 비하인드를 소개하는 방식도 굉장히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국적이나 신원이 어딘지 좀 모호한 부분도 왠지 좋았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 세워진 단조로운 세상에 ‘정보’를 매개로 색을 덧입혀간다는 이 조직의 설립 이념에는 전직 IT 업계 종사자로서 살짝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일명 ‘대공동’ 사태 이후 완전한 무(Void) 상태로 돌아간 세계에서 펼쳐온, 그리고 펼쳐질 WP의 활약이 궁금해진다.
사실 어떤 특별한 조직을 위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떠올리자면, 그들의 활약을 순진하게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그 숨겨진 꿍꿍이가 드러나길 기다릴 정도로는, 비슷하게 그려진 세계관을 여러 번 접했는데 그럼에도 WP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속셈이라든지(물론 그런 게 있다는 전제 하에)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균열도 서서히 밖으로 새어나오기를 고대해보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보다 우선적으로 실컷(?) 보고 싶은 건 하정이나 츠바사를 위시한 조직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루되는 여러 사건 에피소드인데 이건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봐야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냄새(?)를 맡는 감이 뛰어난 편은 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읽는 내내 은은한 대작의 기운을 감지하고 오랜만에 가슴이 좀 뛰었다. 작가가 공들여 짠 글타래를 게으르게 읽어내릴 수 있는 독자의 기쁨이 새삼 배가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