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의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있나요? 작품 속 주인공의 누나와 같은 상황에서라면 저는 도저히 취직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한때 먹여 살렸던 동생들에게 미안해서 존재하기가 참 미안해질 것만 같아 아찔합니다. 지금도 제가 1인분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거든요.
그래서 역으로 10년 전을 상상하면, 세상이 그리 많이 바뀌었는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교통카드가 나왔고,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지긴 했지만, 글쎄요, 유행하는 노래가 바뀌었다거나, 웹사이트 뜨는 속도가 빨라졌다거나, 유명한 사람도 TV가 아니라 유튜브에 나온다는 점이 좀 다를까요. 가장 많이 바뀐 게 있다면 그건 저일 것 같습니다. 10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고, 그 모든 시간이 제게 쌓여서 저는 그때와 할 수 있는 일도, 생각하는 것도, 심지어 생활 패턴도 달라졌거든요. 그야 하는 일이 달라졌으니 당연하긴 합니다만.
그러니 10년 동안 의식없이 얼어 있던 사람은 10년 전과 똑같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환경이 바뀐 탓인지 누나는 굉장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니 그럴 수 있다고 여기기엔, 아무래도 일주일에 하루만 가도 지칠 보호소를 스물한 군데나 도는 건 상식 밖의 일입니다. 그 정도면 시간 여행을 해서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해야 하는 수준이지 않나요? 그렇게 사람이 일주일을 살 수 있나요?? 네, 누나는 합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일인데, 세상과 가족은 무서울 정도로 평온하기만 합니다. 그러면 역시 아무것도 아닌 일에 제가 괜히 과민하게 군 거겠죠…. 그렇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건이 집에서 일어나고 맙니다.
첫 월급으로 산 물건을 기억하나요? 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주인공의 상황에 분노하기는 충분했습니다. 돈은 모으기는 어려운데 쓰기는 쉽고, 가사 노동은 생존을 걸고 영원과 싸우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을 만큼 무겁게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걸 해 주던 로봇을 기증하고 본인들은 할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집에서 일하는 건 주인공뿐인데도요.
화가 나는데, 다들 너무 맞는 말만 합니다. 안 그러던 사람들이 그러는 만큼 해야 할 근거도 확실합니다. 선의는 당장의 이익과 관계없이 인간성을 보호하는 의지인 줄만 알았더니 한없이 합리적이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합리적이었으면 지금 세상이 이랬을까요? 합리만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강제도 있고 회유도 있어야 좀 바뀔 듯 말 듯한 게 제가 아는 사람인데 여기서는 무슨 전염된 것처럼 다들 착해집니다. 정신병 중에서는 주변 인물이 바꿔치기당했다고 믿는 증상이 있는데 꼭 그것처럼 느껴질 만큼요.
그래서 무엇을 의심해야 할지조차 막막해지던 시점에서 알게 된 누나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차라리 안심이 됐습니다. 이 와중에도 자신에게 누나가 누나일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할 수 있는 주인공이 굉장했어요. 언제 착해질지 모르는데도요. 독자로서는 착해지는 게 무서울 수 있단 점이 즐겁기도 했습니다. 사랑이 증명되었을 때는 주인공도 어쩔 수 없이 이 흐름에 동참하리라 생각했죠.
사후 서약서를 보니까 작품 밖 제 뒤통수까지 얼얼해지더라고요…. 이들의 숭고함은 전체주의의 절대선 같은 면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은 그저 부품이고, 전체를 위해서라면 삶도 죽음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요. 다만 여기서는 모두가 정말로 자기 의지로 바쳐진다는 게 오싹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똑같은 사회, 똑같은 행동을 지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면서요.
그런 의미에서 제게는 악몽 같은 10년 뒤의 세상이 주인공에겐 도피처가 됩니다. 그건 저와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고, 아직 빛나는 선의에 감염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묘사를 보면 불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건 영영 밝혀지지 않을 미래니까요.
사람이 조금씩만 더 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안일하다고 일침을 놓는 듯한 작품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그래요, 사람은 얼마든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