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눈이 쌓이고 녹는 과정은 자연스레 시간의 축적을 연상케 한다.
눈이 바람에 휘날리며 하염없이 쌓여가는 동안 조와 수는 함께 있었다. 눈을 통해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눈이 그 공간을 세상으로부터 잠시나마 가려주었다는 점에서, 그럴싸한 공간으로의 눈의 기능에 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비는 하지 않는 걸 눈은 하니까.
아마 경찰이 죽은 수를 발견하고난 다음, 쌓인 눈이 태양볕에 쪼여가며 죄 녹아갈 즈음이면 세상에 남은 수의 흔적 역시 빠르게 휘발되어갈 것이다. 그 어떤 대단한 이라고 해도, 망각의 다른 말일지도 모를 죽음 앞에선 별다른 수를 찾지 못할 것이다. 눈보라처럼 흩날려 사라지기 전, 수는 조를 떠올렸고, 함께 나눈 시시하면서도 이따금 포도알 같은 알갱이가 씹히는 농담을 복기했다. 그 산 듯 죽은 듯 경계에 놓인 말들이 눈처럼 쌓이는 찰나에 수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얕은 호흡처럼 간간이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칠 때면 그는 이미 비워버린 잔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웃음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적 수업 때 의식의 흐름 기법이란 개념을 배운 적이 있다. 당시에 배운 지문은 아마 한국의 어느 남자 작가가 쓴 소설에서 따온 거였겠지만, 지금의 나는 ‘델러웨이 부인’의 여러 대목으로 각인하게 된 개념인데, 수와 조가 나누는 대화를 읽으며 이 기법의 효용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뚜렷한 실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 서늘하고도 미지근하게 뭉클한 느낌이 꼭 손 안에 눈을 쥐고 있는 기분과도 비슷했다.
만일 사후 세계란 게 존재한다면, 눈보라가 전부 물러난 후 둘이 느긋하게 둘러 앉아 다 끝내지 못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마저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물론 그러다가 허기를 달래려 간 끝내주게 맛있는 훠궈집에서 이어지는 2차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둘 사이에 놓인 시간은 무진장으로 수렴하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