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연계된 복수는 삶에서 생명을 모두 지우는 행위다.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 그러하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복수의 운동성은 끝없이 죽음을 향해 이동하며 필요하다면 당사자의 죽음마저도 비용으로 지불된다. 복수가 삶을 완전히 파괴한다는 말은 절반 정도만 유효하다. 복수는 이미 삶이 파괴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생존은 그에 비하면 훨씬 더 간단하다. 그저 삶을 지속하는 행위를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나 간단하다고 해서 그것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 생존은 그 자체로 천진한 잔혹성을 띄고 있는 개념이다. 자연 상태에서 개체는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위의 무언가를 사냥하고 먹어치운다. 영역 보호와 번식을 위해 동종을 살해하는 일도 빈번하며 여기엔 죄의 개념이 없다. 살아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해야한다.
작품 속의 두 인물 ‘선비’와 ‘대장장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 안에서 복수와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영역을 꾸준히 간섭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은장도’는 이런 두 사람의 영역을 이어주는 매개로 작용한다. 은장도는 선비에게 결코 오지 않을 딸의 성년을 축하하기 위한 물건이며 동시에 딸의 죽음을 애도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즉, 죽음의 영역에 놓여 있는 물건이다. 그에 반해 대장장이에게 은장도는 위험하되 값이 비싼 주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작품의 전개는 선비가 대장장이를 찾아와 딸의 죽음을 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딸의 죽음을 전해들은 대장장이는 외려 산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복수를 만류한다. 선비는 복수를 포기한 대장장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직조되는 베처럼 두 사람의 정서는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엮여 있지만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 탓에 이어지는 것이 불가능한 셈이다.
대장간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이토록 섞이지 않는 성질의 인물을 배치했기 때문에 작품의 결말은 예측하기가 쉽다. 작가가 보다 더 정교하게 짜임새를 맞추거나 반전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노력하지 않는 한은 독자가 반전에서 어떠한 충격을 느끼기엔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다. 인물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행동과 살해의 동기를 풍성하게 꾸려 넣는 것이 더 극적인 연출이 될 수도 있다.
작품은 복수와 생존의 충돌이라는 관념적인 구조를 두고도 현실적인 연출에서 아쉬운 면을 드러내는 부분이 곳곳에 있다. 일례로 대장장이가 위법으로 만든 무기 때문에 선비가 대장장이를 복수의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점은 살해의 동기치고는 의아한 감이 없잖아 있다. 무리를 이룬 괴한들이 열다섯의 여아를 유괴하고 살해하는데 무기가 과연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낫 한 자루 없이도 장정 서넛이 15살 여아를 살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물론 그 사이에 하인이나 다른 가족들이 끼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작품 내에는 드러나지 않아 독자가 상상만으로 그 공백을 채우기에 어렵다. 굳이 가해-피해의 구도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딸아이의 납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차라리 장성한 아들을 피해자로 두었다면 보다 더 설득력을 갖지 않았을까 싶다.
내친 김에 메타포의 흐린 이미지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작품은 은장도라는 소재를 통해 선비와 대장장이를 같은 공간에 묶어두었지만 은장도의 이미지는 필요한 만큼 강조되지 못했다. 작품은 도입부에서 대장장이가 주조하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표현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호미’는 대장간 작업을 연출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 게다가 선비와 대장장이가 적의를 드러내는 결말부에서 긴장감을 가져오는 소재 또한 은장도가 아닌 ‘환도’였다. 은장도는 복수와 생존의 고리보다는 딸아이를 향한 ‘조의’의 이미지로 더 생생하게 존재감을 부풀린다. 대장장이가 아닌 선비의 서사에 무게를 더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이야기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울어버린다.1
핍진성이 높은 단어의 활용은 작가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런 연출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대사들은 조금 더 다듬을 필요가 있다. 특히 ‘~옵니다.’식의 말투가 과하여 모더니즘 연극을 보는 느낌을 준다. 조선시대를 다룬 것으로 유명한 소설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남한산성>, <칼의노래>, <달을 먹다.>등이 떠오르는데 이런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면 <은장도>에 몰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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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에 비판점을 조금 지목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은장도>는 좋은 소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특히 사회 부조리로 엮인 선비와 대장장이가 가해의 주체에는 항변하지 못하고 말미에 서로 대립하는 장면은 근래에 브릿g에서 보기 힘들었던, 울림을 주는 연출이었다. 전반적으로 흥미로운 구도, 좋은 소재를 가진 작품이지만 한정적인 분량에서는 빛을 발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유가 되신다면 중장편으로 각색하여 연재해보시는 것도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