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의 애독자로서 항상 이 작품에 관심은 있었지만, 연재중인 작품 몇 편만 훑어보고 지나가는 것만 몇 차례 반복했던 이유는 작품의 방대함도 방대함이지만 솔직히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나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으며 한껏 높아져 있는 기대수준을 과연 이 작품이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때문이었다.
하지만 종이책 출간을 계기로 작품을 본격적으로 읽어볼 기회가 생겼고, 그 동안의 망설임은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여러면에서 새로운 판타지 소설이다. 중세시대라는 어느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인간을 비롯한 이종족과 용과 트롤 등의 마수들, 마법과 검, 기사 등이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의 문법과 세계관을 따르면서도 기존의 판타지 소설과는 차별화되는 흥미로운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작품의 서장을 읽으면서 좀 실망을 했었다. “너를 먹겠다.”는 소설의 첫 문장이 보여주듯 소설은 용이 영주의 딸을 한 끼의 식사 거리로 납치하면서 시작된다.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용에게 납치된 영주의 딸이라니… 그 영주의 딸은 분명 천하의 절색일 것이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영주는 용감한 기사를 모집할 것이고, 어찌어찌해서 용기 있고, 무예도 뛰어난 데다가 인성도 바른 한 기사가 용을 무찌르고, 그 둘은 그 사건을 겪으며 사랑에 빠져서 그 이후로도 쭉 행복하게 살았다는 보지 않아도 읊을 수 있는 스토리가 눈 앞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90여매에 이르는 서장만으로 여타의 판타지 소설과 차별화되는 점을 보여준다. 먼저 영주의 딸은 손에 물한방울 안 뭍히고 곱게 자란 부유한 집안의 인형 같은 외모를 지닌 딸이 아니다. 또 영주의 딸을 구할 용감한 기사는 애초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우리네 속담처럼 용에게 물려간 그녀는 타고난 식견과 언변으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용의 한끼 식사거리라는 위기에서 벗어나 오히려 피어클리벤이라는 자신이 속한 가난한 영지의 부흥을 위한 기회로 만든다.
또한 서장에서는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재미의 요소가 드러난다. 바로 ‘교섭’이다. ‘교섭 판타지’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서장에서 영주의 딸 울리케 피어클리벤이 보여준 ‘교섭’ 능력은 이 소설을 끌어가는 핵심 동력이다. 사실 수많은 등장인물이 얽히고 설킨 이야기지만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고 표현하면 단순하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이야기의 큰 맥은 가난한 영주의 팔녀인 울리케 피어클리벤이 용의 한 끼 식사로 잡혀왔으나 교섭과 협상을 통해 숱한 위기를 넘기고 마을을 구할 방법을 찾아나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의 큰 재미이자 원동력은 교섭과 대화의 시작과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얻고, 내가 원하는 걸 관철시키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소설은 총 8권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들었다. 아직 1권만을 읽어본 독자로서 이후에는 어떤 교섭과 협상이 있을지, 작품의 제목처럼 피어클리벤의 부흥을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질지 기대가 된다. 또한, 독자로서 고민이 생겼다. 이대로 한권씩 출간될 때마다 바로 읽어볼 것인가, 아니면 8권 출간을 기다려 한꺼번에 읽을 것인가가 그것이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독자로서 나름 행복한 고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