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호러에 관련된 외국 자료를 뒤지다가 벨기에의 호러 영화 감독인 아르네 뒤켕이 1997년에 제창했다는 작품 분류법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뒤켕은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은 전무한 수준이지만 (유튜브에 조회수 100 이하인 단편 두 개가 올라와 있는데, 보고 나면 제 망친 작품을 읽는 것처럼 민망한 느낌이 들더군요ㅠㅠ) 분류법 자체는 나름 중2중2한 느낌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큐레이션에 응용해볼 수 있겠더군요!
부연하자면, 뒤켕은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스티브 톰슨의 민담 분류법에서 힌트를 얻어 호러 장르로 파악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핵심적인 소재 유형에 따라 다섯 가지로 나누는 분류법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류법의 이름을 ‘사악한 오망성’이라고 붙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시로 든 작품들은 제 기준으로 특히 재미있었던 작품들을 선별한 것입니다.
(1) 사악한 괴물: 이 범주에는 작품의 <호러적 효과에 있어> 독립적인 ‘자아’를 지닌 비인간적 존재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작품들이 분류됩니다. 생물이나 심령체(귀신) 외에도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인격을 가진 인공지능 (HAL이라던가) 또한 이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이시우 – 종로의 개: 괴물의 비쥬얼과 고유한 속성이 잘 버무려져 압도적인 인상을 자아냅니다. 주인공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오는 괴물이 등장합니다.
엄길윤 – 정신강탈자: 통제되지 않는 정신이라는, 강박증의 권화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괴물의 특성 자체가 무시무시합니다. 인간의 정신 속에 숨어있는 괴물이 등장합니다.
박해수 –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로봇의 정교한 논리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갔는지를 알게 되면 비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소름이 돋습니다. 주인에게 헌신적인 로봇이 등장합니다.
이일경 – Vanishing Entity: 다 읽고 ‘그게’ ‘그거’였다는 점을 상상해보면, 역겹고 끔찍한 느낌이 듭니다. 독특한 생활사를 가진 병원체가 등장합니다.
김태민 – 원숭이들의 왕: 최후반부 폐건물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정경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괴물의 속성 자체가 스포일러라 언급할 수가 없습니다.
(2) 위협적인 물건: ‘자아’가 없는 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개체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작품들이 속하는 범주입니다. 3번 범주와 혼동하기 쉽지만, 변칙적인 현상이 특정한 기물의 고유한 매커니즘에 의해 야기된다는 게 특징입니다. ‘자아’를 가졌다고 보기 힘든 단순한 컴퓨터 알고리즘도 이 분류에 들어갑니다.
그린레보 – 그 책의 이름은 나폴리탄: 바다냄새 자욱한 책 속의 풍경이 오싹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읽는 사람을 잠시 동안 초차원으로 데리고 가는 책이 등장합니다.
클랜시 김준영 – 마지막 질문: 펜이 칼보다 무섭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인지를 자극하는 방법에 통달한 인공지능이 등장합니다.
타우 – 민박집에 선풍기가 산다: ‘쩝쩝’이라는 의성어가 얼마나 공포스러울 수 있는지…. 후텁지근한 여름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야만성의 표현이 강렬한 작품입니다.
gemcart – 마임맨: 어둡고 광막한 공간에서 인형과 함께 춤추는 이미지가 신선합니다. 행동을 따라 하는 인형이 등장합니다. 마임마임.
사이클론 – 피를 먹는 기계: 기계라는 개념 자체를 코스믹 호러의 소재로 삼는다는 발상이 흥미롭습니다. 플롯이 다소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어두운 굴 안을 헤집는 광포한 기계의 묘사가 뛰어납니다.
(3) 적대적인 현상: 정상적인 물리법칙과 유비될 수 있는 초자연적 법칙이 핵심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속하게 되는 범주입니다. 초자연적 법칙을 기반으로 하는 응용과학이라 할 수 있는 ‘주술’이나, 신체의 비정상적인 작용에 기인하는 비병원성인 질병 또한 이 범주에 속합니다.
천가을 – 구멍: 직접적인 묘사는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서술 상의 구멍과 같은 지점에서 공포가 만들어집니다.
지현상 – 문 뒤에 지옥이 있다: 공간의 배열을 바꾼 것만으로 폐쇄적인 감각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한없이 확장되었지만 동시에 한없이 고립된 역설적인 공간이 등장합니다.
노말시티 – 사쿠라코 이야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미스터리한 기조가 일품입니다. 아이를 대상으로 삼는 주술이 등장합니다.
톨toll – 털가죽: 화자에 의해 기술되는 것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toll님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정신병적인 인상이 극한으로 묘사되는 작품입니다.
유상 – 백귀야행(百鬼夜行): 시적으로 표현된 백귀야행의 정경이 아름답고 으스스합니다. 권선징악을 체현하는 신비로운 현상이 등장합니다.
(4) 뒤틀린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라는 용어에 대해 뒤켕은 <알튀세르를 참조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배경이 부족해 정확한 정의는 아닐지 모르지만, 대충 ‘정동의 차원에서 작용하는 근원적인 수준의 인지도식’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범주로 분류되는 소재들은, 거칠게 말하면, 일반인들이 쉽게 공감하기 힘든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이며, 그들이 가진 병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공포의 근원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번연 – 지식의 신: 멀쩡한 정신으로 살기 힘든 오늘날을 반영하는 듯한 핵심인물의 행적이 슬프고 두렵습니다. 고시생 생활의 중압감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인간이 등장합니다.
염소자리 – 13층: 결말이 주는 충격이 현실적이고 강렬합니다.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비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호두빙수 – 집 냄새: 분노조절잘해에 근거한 허세가 아니라, 진정으로 빡친 사람의 모습이 서글픕니다. 타인에게서 받는 스트레스에 정신적으로 뒤틀려버린 인간이 등장합니다.
사마란 – 모란: 시대배경과 부조화하는 것 같은 마술적 소재의 활용이 눈길을 끕니다. 정욕에 번민하다 돌아버린 인간이 등장합니다.
위래 – 존은 맛있다: 직장에서 바쁠 때마다 접하게 되는 상황과 유사한 만큼, 이야기가 주는 울림은 깊습니다. 인간을 기능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5) [데이터 말소]
p.s.
감사하게도 브릿G 큐레이션에 몇 차례 이름이 올라갔었던 터라, 저도 보답 차 큐레이션을 하나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마땅한 주제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에 뒤켕의 분류법을 알게 되어 이거다!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침 호러 붐 얘기도 간간히 나오는 것 같아서, 브릿G 내의 좋은 호러 작품들을 소개하는 데 뒤켕의 분류를 한번 적용해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