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휴) 공모(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티타임의 마르크시즘 (작가: 밀사, 작품정보)
리뷰어: 오리아나, 19년 10월, 조회 217

난 리뷰라는 걸 안 좋아합니다. 잘된 리뷰를 쓰기 위해서는 거기에 자신이 아닌 남의 말이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끊임없이 자신의 말과 남의 말을 걸러내서 분류하고, 이런저런 부분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적시해야 하거든요. 그건 너무나 귀찮은 일이고(이런 일에 단련된 사람들은 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짓을 하느니 차라리 성실하게 출처를 표기하면 표기한 대로 유의미한 논문을 쓰거나 어디서 들은 말도 내 말인 척 잘 포장해서 내놓으면 되는 소설을 새로 쓰겠다는 생각이 들 따름입니다. 브릿지 150코인? 그거 현금으로 환금되나요? 난 평소에 브릿지에서 뭘 읽지도 않아요. 여기 아이디 찾는 데 5분이나 걸렸습니다. 예미 씨벌…

제일 골치아픈 건 나도 몰랐던 누군가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미 해 버린 경우입니다. 그걸 안 찾아봐서 몰랐거나, 찾아보기 귀찮아서 몰랐거나, 하여튼 게을러빠져서 몰랐는데 내 말인 양 그대로 적어놓으면 평소에 교양이 많으셔서, 식견이 깊고 넓으셔서, 이런 일에 관심이 많으셔서 알고 있던 사람이 보면 별 교오양없는 리뷰도 다 있게 되는 거죠. 리뷰가 아니라 소설이라면 독일 이데올로긴지 공산당 선언인지를 조각조각 모자이크해놔도 형식적 파격인지 뭔지…로 참작이 되는데 말입니다. 성실하게 지식노동하기를 포기한 지적 룸펜들은 리뷰를 쓰지 않습니다. 남이 쓴 걸 보고 헤에~~~~~~~~그렇구나~~~~~~~~하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죠.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리뷰 공모까지 한 이 소설에 리뷰가 하나밖에 없는 건요. 왠지 지적이어야 할 것 같잖아요. 이거 읽고 이해해서 리뷰까지 쓰려면.

그런데 그렇게 언어와 사유의 출처를 명확히 표기하고, 공이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가이사의 언어는 가이사에게, 마르크스의 언어는 마르크스에게, 이 문장은 서울 갸라도스 출판사에서 2018년 출판된 꼬부기와 파이리의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인용하였으니 그 책에게 그 영광을 돌아가게 한 리뷰를 읽다 보면 그 정치함과 성실함에 감탄하다가도 때때로 그래서 어쩌라고…마르크슨지 엥겔슨지 그게 누군데…왜 너만 아는 사람 얘길 해? 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하는 것이니 게으른 놈들은 생산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소외감 느끼기만은 이 구역에서 일류라고 하겠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찾아야 합니다.(사실 이 언어와 사유도 제 것이 아닌 어떤 자의 것을 멋대로 빼앗아온 겁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꿈과 혁명과 왕국을 이야기하기 위해 암중모색으로 기어다닌 사람은 기어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언어를 선물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는데,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애초에 언어를 배운 사람이 적어서, 사유할 능력이 없어서, 사유를 해봤자 자포자기적이고 반동적인 결론으로나 발이 꼬여 미끄러지기 마련이라서, 밥을 먹이면 두 다리로 서고 두 팔로 낫과 망치를 들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달리 아무리 양 겨드랑이를 끼고 주체로 일으켜 세우려 해도 흐지부지 주저앉아 버리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대신 그들의 혁명과 왕국을 찾아줄 헌신적이고 할 일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어서…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언어를 찾으러 가지를 못했나 봅니다. 아니면 언어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룸펜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르는 것이던가요. 사실 <티타임의 마르크시즘>이 보기 드문 역사적 부감성을 가지고 이런 그림을 그려놔서 그렇지 서발턴과 주체 같은 건 이제 특정 부르주아들와 프롤레타리아들의 티테이블에선 상당히 흔해진 메뉴읍읍읍(※리뷰어의 가면이 떨어져나갈 것 같아서 긴급히 검열하였음)

나는 찢어진 것을 셀로판 테이프로 붙여놓은 청사진의 테이프 부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부분이 이 소설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장 날카로웠거든요. 물론 다른 부분이 날카롭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서발턴이 무슨 신묘한 액시던트 끝에 결국 언어를 가지게 되고 머지 않은 미래에 이루어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고의 봉사자가 되어 프롤레타리아트와 룸펜프롤레타리아트는 억압받은 자들끼리 완전한 결혼을 이루었다는 뉴스라도 신문에 뜨지 않는 이상 이 날카로움은 <티타임의 마르크시즘>을 하나의 예언서라고 불러도 그렇게 쪽팔리지는 않도록 만들어줍니다. 예언서 사세요, 예언서…

그래도 정신질환자가 그린 장미 그림 위에서 언어를 주조해줄 수 있는 계급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이라는 환상에 가까운 희망도 이 소설에는 존재합니다. 이 문장과 이 문장 앞의 문장 사이에는 아무 연관관계도 없는데, 이제야 까놓는 거지만 이 리뷰의 상당히 많은 문장들이 사실 그런데, (쓰다가 귀찮아졌음) 나는 이 소설을 꽤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좀더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봤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다들 꼭무슨…언어를 박탈당한 것마냥…아무 말도 하지를 않았더라고요. 내 생각에 그것은 리뷰라는 돗자리판이 부르주아지의 습속에 쩐 티룸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재전유인지 뭐시깽인지를 열심히 한 프롤레타리아도 키보드를 쳐놓고 보면 문법은 부르주아가 쓴 리뷰의 그것과 꼭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까지 그래야 할 이유를 나는 모르겠어요. 기껏 네 언어가 좀 엉망진창이어도 괜찮아, 굳이 지금 당장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주체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이라고 말해주는 소설인데.(아니에요? 아니면 죄송)

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한 말인데, 유리창에 구멍이 하나 나 있으면 그 유리창이 여러 개의 돌에 맞아 작살이 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더라고요. 그러니까 누가 이렇게 개발새발 반달해놓은 꼬라지를 보고, 자신감을 가지고 장미 그림이든 만다라든 그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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