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름은 수빈, 당신은 나의 말을 삼킨다. 당신에게 나의 말은 물에 풀어진 휴지처럼 미끄러져내리는 찌꺼기이다. 수빈이라는 이름은 한자 받을 수에 구슬 빈을 쓴다. 나의 임무는 아름다움의 정수를 받아 안는 것이다. 나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하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으면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반복한다. 그렇게 나는 아무 목적도 성취도 없이 끝없이 수직선을 달리는 좌표 A가 된다. 나는 잊고 있던 두 어절을 상기한다. 좌표 A의 이름은 대상 항상성. 까꿍놀이를 생각한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을 때 두 손 너머의 얼굴은 없는 것이 된다. 두 손이 펼쳐지고 얼굴이 드러날 때, 그것은 이전 장면과는 별개의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치명적인 놀이는 그 준비가 번거롭지 않아 어디서나 즐길 수 있다.
대상 항상성. 나에게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イミテーション 石英> 中에서
(저자의 존칭 혹은 경칭은 과감히 생략한 채로 기재해두고자 함)
‘주체와 비체’
받을 수에 구슬 빈을 쓰는 사람. 이 이상으로 더 밀사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자신도 스스로 언급하였듯 아름다움의 정수를 받아들이는 행위를 임무라고 표현해둔다. 나로서는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 나름대로의 어떤 해체적 읽기를 통하여 저자의 생각을 추적했다는 느낌에 도달하였다(확연히 붙잡았는지에 대해선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등 중요한 요점이 아닐 것이다).
글을 쓰기 직전 본격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그것은 하얗고 차가운 손목이다. 그 손목의 주인은 필시 밀사일 것이다. 밀사는 분명 아침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투과하는 동안 그 끄트머리마다 방울방울 맺혀 떨어지는 ‘보석(왜 굳이 ‘구슬’이 아닌 ‘보석’이라는 표현을 쓰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 아귀가 맞아 들어갈 것이다)’같은 이슬에 자신의 손목을 씻어두는 임무를 수행할 것임이 틀림없다. 가장 맑게 때묻지 않은 아침의 결정체인 이슬이야말로 그의 손목을 담뿍 적심으로써 그가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임무 수행에는 어떤 능동성의 여지조차 주지 않으려는 결연함까지 깃들여져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화자(십중팔구는 밀사일 것)는 주체적으로 수동적이고자 하고, 비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지니지 않았을까, 나로서는 다만 그렇게 추측할 따름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밀사가 아닐지언정 그 이야기를 쓴 주체는 밀사임이 틀림없으니 그 단서 또한 밀사 자신이 내세운 장치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밀사가 스스로를 ‘카메라’라는 사물에 비유함으로써 선언하는 듯한 문장을 제시하는 대목이다. 이미 서두부터 그는 ‘나’를 숨기고 ‘당신’을 내세운다. 그러나 ‘나’라는 주격인칭대명사를 내세우기 시작하고 나서도 그의 이야기에는 그의 서사란 정작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온통 ‘석영’이라는 존재가 주체로 채워져 있는 양상이다.
그는 관찰자가 되기로 함을 ‘선택’하였고 바로 거기에서 서사의 경계는 비로소 허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이 소설에서 어떤 확고한 시점과 서사적 구조를 찾아내려는 시도야말로 무용하단 것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야 만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되어 ‘석영’을 비추는 관찰자로서의 밀사에게 주어진 것은 세계를 지킬 수 있는 힘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밀사로서는 세계를 지켜야만 할 수밖에 없는 힘을 그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켜쥐게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의 기록을 읽는 독자는 ‘주체’도 ‘비체’도 아닌 ‘객체’로서 그가 쓴 기록의 방에 초대를 받게 되었을 뿐이다.
‘번역과 재번역의 경계’
혹자는 밀사의 글이란 대개 불친절하고 난해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글속에서 밀사는 주지시킨다. ‘나’는 ‘석영’의 언어를 번역하고 있다고. 이렇게 놓았을 때, 어쩌면 그들–밀사를 불친절하고 난해하다고 평한 이들–이야말로 밀사의 언어를 누구 하나 제대로 시도해보려 노력한 적이 있었을까?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쓴 글을 읽을 수 있는 권리를 구함으로써 그의 독자가 되었고, 숙명적으로 기록의 임무를 수행할 필요성마저 느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어디까지나 ‘독자’의 언어로서 글을 해부하고 다시 봉합해나가는 과정해나가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이 역시 하고싶다, 하고싫다와 같은 호오와는 무관한 것이다. 밀사의 글을 추적해나가고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그 기쁜 일은 어떠한 의무를 던져다 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로 그러하다. 밀사는 평가자에게 화두를 던져주는 사람이다.
우선 석영의 언어를 번역하는 밀사의 모습은 치열하다.
“…그 번역은 우리를 위한 일이 아니다, 그 번역은 나를 위한 일이다…(중략)…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당신이다. 나에게는 오로지 당신을 번역하기 위해 준비된 알고리듬이 있어, 나는 언제든, 당신을 만날 때마다 한가득 얻어낸 당신의 덩어리를 거기에 밀어넣어 분쇄한다…”
글이 불친절하다는 사람의 속내가 이토록 치열할 수 있는가. 물론 나는 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기억이 손에 꼽는다. 그에 대해서라면, 독립문예잡지 소녀문학 2호에 게재된 적도 있었다고 하는 <흔해빠진 여성사> 가 내가 접한 그가 쓴 최초의 글일 것이다. 그가 성노동권익을 위해 힘쓰는 활동가라는 타이틀도 그래서 그의 기록 앞에서는 더욱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따라서 철저히 ‘객체’로서 그를 탐구해내는 것 이상의 역할이 허용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주체’인 ‘석영’이란 사람의 언어를 번역해나가려는 밀사의 언어는 ‘객체’의 눈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시선처럼 연민을 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객체로서 ‘타래’라는 이름의 독자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언어에서 탄생한 대화를 거슬러 올라가 곱씹게 된다. 그렇게 쌀알처럼 씹어본 바, ‘밀사’와 ‘석영’, 이 둘 사이에 ‘타래’가 끼어들어갈 틈이란 적어도 허용되지 않는다. 허용될 수 있는 건 ‘밀사’와 ‘석영’ 간의 관계가 얼마나 벌집의 꿀처럼, 혹은 소나무의 송진처럼 끈덕지게 밀착되어있는가 따위의 농도 및 점도를 탐구해나가는 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대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비현실이란 쉽사리 구분지어질 수 없는 모호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어진다.
어느 쪽이든 나는 불행합니다. 나는 다시금 해리되어, 내가 나를 칭할 때, 그것은 보여지는 나와 보는 나를 동시에 부르는 행위가 됩니다.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는 타자와 자신 사이에 적정한 경계선을 설정할 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나의 세계가 파탄난 이유입니까? 아닙니다. 당신은 내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당신이 진정한 당신이 아니며 모든 것이 나의 환상이라 수천 번을 소리질러도 나를 믿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태는 내가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에 들고 꿈을 잣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존재가 만든 이 세계는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과 사랑을 불신하는 자들의 경멸로 지탱되는 탓에 아무리 암막을 걷어 제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처럼 선연하기만 합니다.
이렇게, 제가 꿈꾸었던 이야기는 제가 바랐던 그대로,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독자인 내가 넘을 수 있는 선의 경계 또한 명확하지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평가할 수 있는 몫은 철저히 제한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간명히 드러내는 구절로 이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평가는 스스로의 몫이 아닌 남의 몫이다’, 이는 예전에 누군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밀사 역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나한테 고스란히 되돌려준 것과도 진배없다. 결국 나는 ‘객체’로서 ‘비체’가 촬영하는 ‘주체’의 모습을 ‘비체’를 통해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로써 내가 마침내 평가할 수 있는 당위성이 자리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주체’와 ‘비체’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객체’는 연민 그 이상으로 카메라라는 경계를 넘을 수가 없음에 마침내 절망하게 되고야 만다. 경계가 구분지어지지 않는 그 서사 속에서 관찰자의 이야기를 관찰할 수밖에 없는 독자는 결국 카메라가 아니라 시청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밀사의 소설은 서사자로서의 고독함이 아닌 구독자로서의 고독함을 가장 처절하게 직시하게끔 한다. 따라서 나의 번역은 밀사의 번역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이게도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어져버리게 되었다. 완성되었지만 완성될 수 없어진 것이다. 밀사는 처음부터 닫혀있었던 이야기를 열어보지도 아니한 채 영영 닫아버렸다. 이는 독자인 나의 언어 또한 열리기도 전에 닫힐 수밖에 없게 돼버렸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짜와 가짜’
이제, 조금 더 화제를 전환해보고자 한다. 줄곧 비체임을 ‘자처해’왔던 밀사가 아닌, 주체로 상정‘지어진’ 석영에 대하여. 그는 지질 · 광물학적으로 건조하게 표현하자면 금강석에 비해 더 쉽게 발견되기 쉬운 광물이고, 세간에서는 ‘수정’이라는 한글식 이름으로도 통칭되곤 한다. 글속에서 밀사는 이 석영이라는 이름을 지닌 주체의 무정함과 사랑스러움을 노래하다가 실망과 좌절을 반복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의 서평 서두에서 제시했던 대목에서와 마찬가지로 읊조린다. 아름다움의 정수를 받아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석영이 글속의 밀사에게 있어 아름다움의 정수 그 자체임을 모르는 사람은 이쯤 이르러 이 글을 읽는 순간에 아무도 모를 리 없을 것이리라. 나는 석영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였다. 석영. 석영이란 그 이름 자체도. 석영의 어떠한 면모를 닮아있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에 대하여서도.
결론적으로 논하자면 그는 진실로 ‘석영’이었다. 밀사는 ‘당신을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이 손끝 어디도 당신의 몸에 닿지 못한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는데, 어느새 당신은 이미 방을 나섰다’는 부분을 통해 그의 무정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눈치가 빠르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내가 쓴 문장 속에서 모순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해당항목 내에서 주체와 비체의 능동형과 수동형의 양태가 뒤바뀌어 있는 문장이 더러 드러나있다는 것을. 사실 이것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어떠한 경계와 완결성, 완성성으로도 읽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밀사의 진심일 수가 있다.
밀사는 진심으로 석영이라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받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것은 대개 덧없기 짝이 없다. 여기서 내가 언급한 ‘보석같은’ 묘사는 석영에게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가 없음을 마침내 고백해두고자 한다. 아침의 맑은 기운을 머금은 이슬은 밀사에게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보석이지만 그것이 나뭇잎 끄트머리로 흘러내리는 순간 뻗은 손목에 적셔진 구슬방울은 보석이 되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야말로 진실로 덧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하여 사랑스럽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주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밀사의 사랑은, 혹은 그가 지닌 사랑의 형태는 그렇기에 적어도 절대로 ‘이미테이션’하지 않다. 크리스털은 다이아몬드의 대체재로서 기능할 수 있으나 이 글에서 밀사의 사랑은 미완성으로 완성지어져버렸기에 결국 누구도 완성해낼 수 없는 ‘진짜’가 창조된 것이다.
‘소멸과 재생’
무한한 루프물처럼 이 이야기의 서사는 닫히되 다시금 쳇바퀴를 굴러가는 일상처럼 반복될 것이다. 크리스털은 주로 서브컬쳐물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마법소녀들의 무기이며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치명적이고 대단한 위력을 자랑한다. 즉, 누군가를 보호할 수도 있기에 파괴해버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하여, 밀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지만 밀사의 사랑과 미움 또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예감한다.
나는 ‘석영’이라는 주체도 ‘밀사’라는 비체도 될 수 없는 객체이기에 마음껏 글을 난도질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음을 그저 밝혀두고자 하는 바이다. 쓰는 것뿐만이 아니라 읽는 것까지 고통이 되어버렸기에 오히려 나의 세계 안에서 밀사의 글은 진실로 그 가치가 크다. 아마도 그것은 프로메테우스가 반복적으로 간을 쪼이는 고통이 환희의 순간으로도 기다려져 올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밀사의 글을 통하여 나는 어떠한 고통의 작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것이 또다른 재생의 순간일 거라는 기대를 조심스레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