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erSider 님께
크툴루 라이징에 부쳐
전반적으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제가 독자로서만 이야기한다면 이야기는 이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혹은 하나 덧붙여, “연재를 재개해 주세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갓 독자의 반응 대신 작품을 끝내고 계속해 나가기 위한 의견을 바란다면, 저는 잠시 편집자의 눈으로 바라보겠습니다. 강조하자면 비평가가 아니라 편집자입니다. 비평가는 작품이 그래서 성공했느냐 안 했느냐를 직접 따지는 작업을 하지만, 편집자는 작가의 편에 서서 작가의 겉드러낸 작품 대신 작가의 원(原) 작품, 작가 자신이 본래 쓰려고 한 것, 다시 말해 작가 자신이 ‘읽은 것’을 독자도 ‘읽게’ 하려고 궁리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작가의 창작성의 진위나 높낮이보다 먼저 ‘독자에게 전달’되는 정도를 높이고, 가능한 쓴 것과 읽은 것의 어긋남을 줄이고, 비록 도달불가능하지만 그래서 기준이 되는 ‘일치’, 독서의 일치, 쓰기와 읽기의 소통의 완성을 기도(企圖)합니다.
독자로서의 제 소감에서 멈춘다면 ‘재미있고, 더 상상하게 된다’라는 감상을 전합니다.
그러나 혹시 편집자의 눈도 바라신다면(지금은 그만두었지만, 잠시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교정교열자로서의 습관은 더 빠졌지만, 편집자로서 읽고 있는 습관은 제가 덜 빠진 것 같습니다.) 아래 쓴 것들을 더 읽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아니라면 여기까지 읽으신 뒤, 혹 감상을 ‘더’ 바라신다면, 약간 더 ‘질문을 섞어’ 써서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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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이라 하더라도 확장성을 가질 때, 또 기성 장르 팬이더라도 새로움과 깊이를 느끼게 할 때, 물론 이 깊이는 이른바 ‘의미’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포함될 수 있는 다종다양한 깊이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감각 체험으로서든, 상상의 지평으로서든, 체감과 이해의 속도로서든. 아무튼 이런 확장성 혹은 심화를 위해서 두 가지 접근이 가능합니다. 작품에 대해 혹은 작품의 세계관에 대해 ‘미리’ 알고 있다고 전제하는 경우와 ‘전혀’ 모른다고 전제하는 경우. 그런데 독자를 유입시키는 것을 원할 때에, 작품이 지속되기 위해 계속해서 읽는이가 존재하도록 길을 놓는다고 볼 때에 그것은, ‘전혀’ 모르는 이가 빨려들게 하는 안배를 ‘미리’ 아는 이가 즐거워하게 하는 것 못지 않게 또는 더 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전혀 모르는 이를 압축적으로 끌어당길 때 이미 아는 이도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체험을 하게 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다시 보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로서 멋집니다. 심지어 연재를 중지하면서 다시금 ‘완결’이라고 하신 거기서 멈추는 것도 좋습니다. 찍어낸 글자만큼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읽고, 더 많은 것을 독자가 머리속에서 계속해서 써 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독서를 멈춘 자리에서 독서가 더 계속되게 하는 것은 작품이 갖춘 미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 장르니까 더 상상할 거리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쓴 게 다인 작품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쓰지 않은 부분을 읽도록 독자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작품은 ‘지금 좋고’,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점이자 단점으로 생각되는 세부적인 시각 정보의 제공. 눈앞에 그려지는 건 좋지만, 대신에 다른 감각 정보의 제공과 불균형해져서 전체적인 ‘시간감각’이 약해집니다. 이야기를 체험하는 인간의 생김생김은 아무래도 ‘시간’을 통해 ‘서사’를 ‘축적’하고 그 축적에 기반해 어떤 새로운 감상이 ‘발생’ 혹은 기존의 편견과 기성화된 감성을 ‘돌파’하는데 그런 축적과 돌파의 힘이 빠집니다.
—> 공동저자 급의 삽화를 나란히 두는 것이 작품의 속도감을 유지하면서도 정보를 보충하는 기능이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직접 그려 보이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도 독자가, 특히나 작품을 잘 읽어내는 좋은 독자일수록, 자기 상상을 통해 그려내는 이미지에는 미치지 못해, 도리어 직접 시각화하는 것이 작품의 느낌을 축소시키는 위험이 있습니다.
—> 시각은 기본적으로 ‘공간적’인데, 청각 등은 그에 비하면 ‘시간적’입니다. 시간적 감각을 보충하거나 시각 정보를 제공하되 그것을 시간에 따라(예컨대, 시선의 이동을 언급하고 반영하면서) 묘사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단지 이야기 서술 자체가 시간선을 따라 이어진다고 해서 독자의 읽기 체험에 시간이 발생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 또는 지금처럼, 건물의 완성된 도면을 관찰하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게 하는, 진열하는 묘사도 좋지만, 그러자면 사건 속에서 잠시 중지된 채 어디로든 열릴 수 있는 하나의 특이점, 풍ㅋ툼punctum을 마련해서 그 특정한 시점(time) 안에 그러한 공간적 조감을 몰아넣는 방법은 어떨까요?
—> 이 방법은 작가의 확신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확신할 수 있다면 독자도 수긍할 겁니다. 작가 자신을 설득하는 감각 또 감각의 중지라면 독자도 동참하지 않을까요?
둘째, 인물에 대한 묘사의 강약 조절.
인물이 조금 평면적인 건 사건이나 세계관, 다른 주제를 드러내는 데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필요한 일이며, 잘되면 독자가 누구이든지 그 인물을 자기 자신으로 해석하는 효과도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독자는 공들여 소개되는 인물을 간단히 소개된 인물보다 더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인물을 통해 작품의 줄거리가 전개되고 비춰질 거라고 기대합니다. 일종의 경제적 독해인데, 만약 이런 인물이 없거나, 이야기 전개에 기여하는 인물의 묘사가 약하면 줄거리와 작품의 구조,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장애가 발생합니다. ‘간략’하다는 건 묘사가 부족한 게 아니라 묘사가 더욱 ‘정확’하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물 캐리커쳐처럼 특징을 집어서 실물과 다른데도 오히려 실물과 똑같다고 여기고, 고의로 왜곡한 가상본으로부터 원본을 호출시키니까요. 어쩐지 작품 속 인물들이 충분히 묘사되지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작품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인물들에 대해 ‘나 그 사람 알아’라며, 혹은 ‘조금 알 것 같아’라며 내 생각을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작품에 대해서도 독자는 ‘잘 모르겠다’는 기분을 느끼는데,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면 작품에 열렬히 반응하기 어렵습니다.
“물리학자의 딸 아니랄까봐….”
물리학 지식의 양이 가족관계에 의해 영향받을 수는 있지만
물리학자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뿐 아니라 그녀도 썩 괜찮은 물리학자라는 설정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아요. 독자는 아무 생각없이 읽는 것 같아도 실은 기존에 마련한 이해 틀에 따라서 ‘적합/부적합’을 가리며 읽고 있기 때문에, 매우 부지런하거나 호의적인 독자가 아니라면 직관적으로 ‘아, 그렇겠구나’ 싶은 게 아니면 불필요하거나 어색한 정보로 분류해서 넘기거든요. 이 경우에는 아버지와 딸 사이 지식 전달의 개연성은 있지만, 아버지가 경험한 사건을 공유하고 감각할 개연성에 비하면 매우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독자는 이 정보를 무시하거나(1) 이런 발화를 한 지안이라는 인물을 불신하거나(2) 둘 중 하나를 택하고 이 지점을 통과할 것 같아요. (2)가 되는 경우에도 (1)이 되는 경우에도 이야기에 대한 몰입이 떨어지지요. 사람이라는 종은 언어의 도움을 통해 현실과 가상을 애써 구분할 뿐, 사실 뇌 자체는 사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읽고 있는 이야기가 픽션인 줄 알고 있을 때에도 사실처럼 경험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려 든다고 생각해요. 인물의 에토스가 떨어지면 인물을 통해 전달하는 사건들과도, 사건의 진실성 말고 안정성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 때문에 충분히 감각하며 몰입하기보다는 일부러 평탄한 심리를 유지하며 겉돌며 관찰한다고 생각해요.
정보량이 많으면 이것은 충분히 유효한 묘사인데, 정보량이 적은 가운데 이렇게 통념에 의지한 표현을 노출하면 독자는 인물 묘사에 대해 건성으로 넘기기 쉬운 것 같습니다.
셋째, 3화부터 이야기 호흡이 물살을 타는 것처럼 매끄럽습니다. 1화와 2화를 ‘도입’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두 화 중에서도 1화의 앞부분은 빠르게 이끌려들어가는데, 문득 그 호흡이 멈춰지면서 작품의 서사가 진행된다는 느낌보다는 작품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 사건 진행과 사건 해설이 섞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소설가 김연수 씨던가, 아무튼 어느 한국 작가였는데, 자신의 작품, 아니, 소설 작업을 내러티브 이론을 통해 짧게 이야기한 인터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그 작가는 자기가 가진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쓰여질 수 있는데, 집필이 결국은 그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하는 내러티브를 찾는 과정이라고. 완벽히 만족하지는 못해도 더는 못하겠다 싶을 때까지 보통 열 번은 고친다고 하더군요. 고치는 횟수가 중요하지 않고, ‘더는 못하겠다’와 ‘이야기’라는 원본’에 접근하려고 내러티브를 사용한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자신이 혹은 다른 누가 다시 써도 이보다 낫게 쓸 수 없다고 여겨질 때 그때에는 작품에 만족하고, 다른 누가 더 잘 쓸까봐 조마조마하지만 아무튼 자신으로서는 더는 쓸 수 없다 싶을 때 탈고한다더군요.
크툴루 라이징이 더 강렬하게 읽힐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외람되지만, OuterSider 님께서 힘들어 하며 썼다는 느낌을 봤습니다. 3화 이후 특히 6화까지는 전체적으로 쓰고 싶은 대로 썼다는 느낌인데, 1,2화나 7화 일부는 쓰는 사람이 힘들어한다는 느낌을 읽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실제로 쓰시면서는 그러기는커녕 정반대였는지 아무 차이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한다’는 느낌은 읽기를 방해합니다. 읽는 자는 단호하고 냉혹하게도 쓰는 자가 쓰기 전과 쓴 다음에는 평범하고 가까운 사람이기를 바라도 쓰는 동안에는 신과 같기를 바라거든요. 그래야 감히 자기는 쓰고 나는 읽게 하는구나, 하는 상황이 굴욕감 없이 받아들여지니까요.
작품이 단독 존재가 아니라 쓰기와 읽기라는 두 언덕 사이를 오가는 배와 같고, ‘사람’이라는 창을 통해 왜곡되어 이루어지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OuterSider 작가의 작품이 좀 더 반향을 얻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작가가 다르게 쓸 수 있는지, 작가 자신의 [가능한, 또는 고려한 여러] 버전 중 지금 보여 주신 것이 최선이라고 확신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까닭은 모르겠는데 어쩌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여쭙니다.
작품이 작가 자신에 의해, 그리고 독자들 사이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