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작 <킬링 타임>을 읽고 ‘기억’과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 같은 경험들은 개인의 잠재의식 속에 어떠한 형태로 저장되었다가 추후에 재생, 재구성,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기억 (記憶, Memor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 고동 치는 두번째 심장이기 때문이다.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들은 마치 동식물이 퇴적, 암석화의 과정을 거쳐 화석이 되듯이 사건의 잔상과 흔적, 진실의 파편 속에서 원형만이 살아남아 개인의 의식속에 퇴적되고 암석화된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겪고 경험을 하든지간에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재생되고 재구성하느냐에 따라 행복한 기억이 될 수도 뼈아픈 추억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기억이 개별적으로 형성된 주관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시간은 타인과의 공유의 문제이며 또 관계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타인과의 시간을 쌓아나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시간을 그의 곁에서 보내며 그 시간 속에 함께 했던 경험을 담는 일이다. 함께 시간을 공유한 당사자들만 이 기억하는 ‘체험되는 시간‘을 만들고,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이 손가락 사이로 슬그머니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은 개인적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개인이 자신이 보낸 시간으로 영향을 받았다면, 그 시간을 공유했던 타인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단순히 시공간만을 공유하며 서로간에 어떠한 영향도 주고 받지 않았을 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체험되는 시간‘이 아닌 ‘죽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본작 <킬링 타임>을 읽으면서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부분은 시간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PD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PD는 시간을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들의 갈구의 정도를 파악하여 시간을 그들이 원하는대로 사라지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져버리길 원하는 그 시간들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근원적인 시간이었을 수 있다. 개인이 독점할 수 없는 공유하는 시간이기에 어느 일방의 동의만으로 시간 자체를 없애버리는 설정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시간을 공유한 어느 일방의 요구로 인해 시간이 사라졌다면, 그 시간이 그 자신의 근원적인 시간일 가능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 시간을 공유했던 다른 사람들의 삶에 원치 않는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PD의 능력이 ‘시간’이 아닌 ‘기억’을 조정하는 것이었으면 어땠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보았다.
인물 설정에서 어색하게 느껴졌던 부분을 한가지 꼽는다면 신입요원 빌리를 꼽을 수 있다. 빌리는 외관상으로는 근육질의 팔뚝과 건장한 체격의 보유자로, 성격적으로는 논리와 냉정함이 부족한 다혈질의 감정적인 요원으로 묘사되고 있다. 다소 의아했던 것은 다혈질의 소유자인 빌리가 PD를 체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대사를 하고, ‘빌리’라는 남성성이 다분한 이름과는 달리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킬링 타임>이 단편소설임을 감안할 때, 등장인물의 케릭터를 명확하게, 일관적으로 가져갔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