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렌힐트는 탐험가입니다. 그러나 탐험가라는 직업을 상상할 때 자연스레 떠올리는 낭만이 브렌힐트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원해서 선택한 직업도 아닌걸요. 하기야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7년 전 브렌힐트는 난데없이 눈을 떴습니다. 포맷한 컴퓨터처럼 자신에 대한 기억도 세계에 대한 정보도 깔끔히 지워진 상태로요. 어찌된 일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도 생존본능만은 생생히 발휘되었는가 봅니다. 그쪽의 세계가 꽤 평범치 않았음에도 어찌저찌 7년째 살아내는 중이니까요.
멸망한 도시들이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그 도시들의 근방으로 위성처럼 작은 촌락들이 들어섭니다. 지도를 보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도시의 생존자들이 개척지를 일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척박한 땅이고 물자는 언제나 부족합니다. 때문에 촌락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쓰임이 있어야만 합니다. 인류애나 동포애는 개나 주라죠. 생존에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 그 효율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깨끗한 물도 작은 식량조차도 얻을 수 없는 세계에선 학대와 갈취, 폭력조차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가 알량한 배급에 사력을 다합니다. 브렌힐트와 같은 탐험가는 아마도 그 사력의 정점에 선 자들 같구요. 고아에 배경도 알 수 없고 기억도 없는, 가진 건 몸뿐인 여자가 탐험가가 된 건 냉혹한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꽤 운이 좋았던건지도요. 잘 싸우고 잘 버티고 잘 견디는 브렌힐트는 오늘도 쓰임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파괴된 도시를 탐험하고 돌아옵니다. 이번 탐험에서 획득한 건 깨진 비스킷, 육포, 생수통, 등유, 실타래, 약, 낙하산입니다. 낙하산이라.. 슬슬 멸망한 도시들의 정체가 궁금해질 때쯤 그것이 등장합니다. 거대한 것, 금속 다리가 네 개나 달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 괴물, 곰과 같은 포표까지 내지르는 그것 “칼라흐”가 브렌힐트의 촌락을 불태웁니다. 그리고 그 순간 브렌힐트의 내면에서 정체를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인 어떤 “자아”가 눈을 뜹니다.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싸울 수 있다고 말하는, 싸우겠다는 다짐을 일깨우는 목소리. 브렌힐트를 브렌힐트가 아니게 만드는 무엇 앞에서 브렌힐트는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열고 불타는 촌락을 향해 달려나갑니다. 브렌힐트의 무엇이 이끌고 올 미래에 대한 불안은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말이죠.
칼라흐의 등장으로 브렌힐트의 삶은 이전의 7년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명, 비합리적 종교재판, 고문, 자매라는 존재들과 살인사건, 무엇보다 읽는 내내 알쏭달쏭한 세계관의 한가운데서 독자는 우왕자왕 할지도 모르지만요. 브렌힐트는 유능하고 똑똑하고 뚝심있게 오롯합니다. 편안한 환경에 늘어지지도 불안함으로 우왕자왕 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 해서 거의 종말에 가까웠던 세계, 그 세계의 비밀과 브렌힐트가 엮여있는 자매들의 신비, 어쩌면 사랑이 2부로 나아가며 더욱 장대해지겠지요? 아직은 어렵게 느껴지는 브랜디쉬의 세계가 날렵하게 손 안에 잡히는 완결의 날까지 내내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