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 감상

대상작품: 라만차의 기사 (작가: 김성일, 작품정보)
리뷰어: 캣닙, 19년 6월, 조회 84

아포칼립스 장르를 보면 인간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일라이나 매드맥스 시리즈 일부처럼 도시를 일구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폐허와 황야를 헤매는 클리셰가 꽤 많다. 마을이 생기면 떠돌던 유목민들이 약탈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좀비가 있는 경우도 아니라면 왜 밭을 갈아 자급자족을 못 하고 힘들게 떠돌거나 위험을 감수하고 약탈을 하는가. 가장 적절한 답은

“농사 지을 기술을 잃어버려서”

-일 것이다. 당장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씨앗에서 싹을 틔우려면 종자별로 땅에 얼마 깊이로 묻어야 하는지, 물은 얼마나 줘야 할지, 거름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아는 게 전무하다. 그야 검색하면 필요한 지식을 대강이나마 찾을 수 있겠지만 인터넷도, 읽고 쓰는 법도 잃어버린 세상이라면 뭘 어쩔 것인가. 원래 1차 산업만 해 먹고 살던 옛날이라면 부모를 돕던 청소년도 그럭저럭 농사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니다.

농사 지식이 있다고 해도 일이 단순하지가 않다. 텃밭을 인력으로만 갈아 자급자족하는 일도 잘 생각해보면 물을 쉽게 얻는 수도시설과 화학 비료가 있기에 가능하다. 좀 더 큰 밭이나 논을 유지하려면 트랙터가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던 옛날 진짜 인간의 노동력으로만 농사를 짓던 시절 기아가 빈번했음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은 언제고 다시 되풀이될 수 있음을. 기술을 잃어버린다는 의미는 결국 인간이 생존을 넘어 존엄을 유지할 환경인 문명을 잃어버리는 과정이기에 아포칼립스 장르가 그저 황당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작중에 나오는 ‘기사’라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점을 스승에게서 배우고 내다볼 줄 아는 지식계층에 속한 이들이다. 그래서 기술을 되찾고 복원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그저 명예욕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전투광이 아니기에 그 싸움에는 인간을 위한 진정성이 부여될 수 있다. 과거의 첨단 문명을 되찾는 일은 요원할지라도 당장 사람들의 삶을 유지하는 수단이 기술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정치체제는 비록 봉건시대로 되돌아갔지만, 공장에서 물품을 생산하고 전기를 사용하는 등,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기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적으로만 나오지만 기사의 이웃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라만차의 기사는 단순히 현상 유지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바라고 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활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은 단순히 현재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미래를 발전시키기 위해 있기 때문이다. 현세대는 더 나은 미래를 후세에 물려줘야 하는 의무. 인간이 기술을 지니게 된 진정한 이유를 알기에 기사는 제자를 키운다.

있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그렇기에 잃어버린 기술을 되찾아야 하는 일. 그게 바로 문명을 일궈낸 인간이 기술을 대하는 자세여야 한다. 라만차의 기사는 이를 알기만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천을 하기에 진정 기사라 할만하다.

물론 이런 부분을 생각 않더라도 ‘기사’라는 단어와 메카닉의 연결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세계관과 전투는 웅장하며 흥미롭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여러 가지 낭만을 갖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풍차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적, 저물어가는 인간 시대에 맞서는 기사와 산초, 로시난테의 활약이 부디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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