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동 문고 같은 서술법을 고집합니다. ‘동화적인’이 아니라 ‘아동 문고 같은’입니다. 동화적인 글과 아동 문고다운 글은 분명히 다른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작가가‘동화적인 서술’을 차용할 때 노리는 효과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끔찍한 상황을 문체와 대비시켜 갑갑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게 있지요. 예시를 찾는다고 멀리 갈 필요도 없어요. 브릿지에서 연재 중인 “언제나 밤인 세계”의 도입부에서 해당 기법을 보여줍니다. 악마적인 샴쌍둥이의 탄생과 그로테스크한 가정불화를 잔잔한 문체로 보여줬지요. 그런데 닫힌섬에는 그런 효과가 없습니다. 동화 같은 문체가 제자리에 멈춰서 별다른 역할을 마주하려 하지 않아요. 왜 그런지 생각해 보기 전에 제 책장에 꽂혀있는 진짜 아동 문고를 한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제목 : 어? 내 표범 팬티 어디 갔지?
“
어? 내 표범 팬티 어디 갔지?
악어가 눈가리개로 쓰고 있대. (팬티 뒤집어쓴 악어 그림)
뻐꾹새가 둥지 장식으로 걸었대. (팬티 걸어 놓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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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입니다. (이거 실제 책입니다. 검색해 보세요)
눈치가 빠른 분은 이쯤에서 왜 도래솔미님의 단편이‘동화 같은’이 아니라 ‘아동 문고’같다 표현한 건지 이해하실 겁니다. 표범 팬티와 닫힌 섬. 두 작품의 공통점은 뭘까요? 답은 정보의 부족입니다. 간단히 말해 내용이 없습니다. 물론, 물론, 닫힌 섬과 먼바다는 쪽수만 봐도 표범 팬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량을 과시합니다만… 그 내용의 밀도만 보면 꽤 비교할 수 있는 분량이 됩니다. 캐릭터, 배경, 갈등… 모든게 피상적이고 상상력을 발휘할 여백은 지나치게 넓습니다. 동화적인 서술을 표현 도구가 아니라 부족한 내용을 가리는 연막으로 사용한 겁니다.
위의 내용을 다 무시하더라도…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표범 팬티를 한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문장간에 인과성을 부여해서 좀 이야기 답게 만들었습니다.
“
어? 표범 팬티 어디 갔지?
표범이 가져갔대.
내 팬티 돌려줘.
이건 내 가죽이야.
돌려주지 않으면 아빠를 부를거야.
난 인간이 두렵지 않아.
탕! 표범은 쓰러졌어요. 그리고 일어나지 않았답니다. (죽은 표범 그림, 엉덩이 털이 없음, 옆에서 꼬마가 팬티를 뒤집어씀)
“
짠! 팬티 찬양보다는 그럴듯해 보이는 스토리가 됐습니다. 저 짤막한 문장에서도 갈등과 용기와 죽음,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거냐고요? 닫힌 섬에는 용기와 죽음 같은 게 없거든요. 굳이 따지면 결말에서 죽이기는 하지만요… 폭력이란 개념이 없는 세상에서 죽인다고 해 봤자 감정이 살지 않아요… 폭력이 없는데 죽인다고? 대단히 현학적인데? 아니에요… 이게 철학적인 글이 되려면 독특한 설정에서 파생되는 결과들에 대한 묘사가 있어야 하는데 (무폭력, 한정된 자원, 철저한 공동 사용) 그냥 자원 다 써서 망해가다가망해간다가 전부에요. 에초에 인물들이 기믹 하나씩만 달고 있는 인형인 데다가 사람 같지도 않아요. 묘사가 부족해 그런 거겠죠. 전 작가의 말을 보기 전까지 얘네들이 자아가 있는 외계 생명체 같은 건 줄 알았어요. 그리고 대체 선조의 영혼은 왜 등장했어야 했나요? 그나마 존재하던 감정의 불씨를 신적인 존재가 나타나서 없애버렸어요. 고조된 감정 (별로 고조되지도 않았지만)을 그렇게 해결해버리면 진짜 데우스 엑스 마키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