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는 작품인 동시에 좁은 견문을 망치로 두드리듯 깨우치는 놀라운 발상에 빠져드는 단편이기도 하다. 작품을 보며 내내 연상된 작품이 바로 앤드류 니콜 감독의 1988년 작 ‘가타카’였다.
그 미래는 유전자에 의한 우생학이 세계를 지배하는 데 성공한 세상이다. 유전자 조작 기술로 태어난 아이들은 우월함을 인정받아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지만 자연적으로 태어난 이들은 소위 3D 업종을 전전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주인공은 혁명가는 아니지만 대신 자기 자신을 구원한 케이스에 속한다. 비록 남의 신분을 훔치는 편법으로 기회를 잡지만 끊임없이 우성인자들 사이에서 열성인자인 자신을 입증하는 데 성공해내는 훌륭한 영웅 신화 변주의 사례였다.
여기서 ‘나는 바나나다’의 주인공 미셸에 대응하는 인물은 주인공에게 신분증명서인 DNA의 조각들… 소변, 머리카락, 각질, 혈액 샘플 등을 증여해주는 대신 룸메이트로 숨어 살며 물질적 혜택을 공유하는 ‘제롬 유진 모로우’라 하겠다. 그는 수영 은메달리스트에 빛나는 우성인자이지만 불운한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다시는 명예를 회복할 수 없는 몸이다.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 가타카 세계관은 국가에 공헌했다 해도 장애를 얻게 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기에 신분과 샘플을 주는 대가로 더부살이를 해야만 하는 가혹한 배경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처음에는 주인공 빈센트에게 영 냉소적이던 유진도 결국 태생을 극복하려는 그의 끈질긴 분투와 진심을 이해하고 빈센트의 꿈에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보태주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말은 명작 영화로 화자 되기에 부족하지 않은 감동적인 우정이자 인간 승리 스토리이지만 한편 순진하고 시혜적이라는 비판 역시 피할 수 없기는 하다. 유진 모로우를 주인공 빈센트를 위한 순교자로서가 아니라 엄연히 희비를 겪은 한 인간으로 본다면, ‘나는 바나나다’의 미셸에 대입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이 단편 소설을 접하고서야 가타카를 볼 때는 못 봤던 옥에 티를 깨달았으니 이는 참 견문을 넓히는 기쁨과 추억보정에 금이 가는 슬픔을 동시에 접한 드문 경험이라 하겠다.
미셸의 세상이 유전 선택적 우생학의 아이들이 멸종될 위기에 처한 세상이라면 가타카를 포함한 많은 SF 작품에서는 우생학이 성공적으로 신분적 격차를 벌리고 강화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발상을 뒤집어 다양성이 사라진 우생학적 유전자의 멸종을 이야기한 이 단편은 자루에서 튀어나온 송곳과 같다. 동시에 우생학이 성공했건 실패했건 간에 선별되어 태어난 아이들이 결국 그놈의 우생학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어버릴 수 있음을 제대로 포착해냈단 점에서 흥미롭다.
유진과 미셸이 거울상이라면 빈센트의 거울상은 아마도 아마디스가 되어야 하겠지만 그는 개인의 영달에는 큰 관심이 없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일종의 혁명가적 정체성을 지녔다. 작가님의 개인적 지적처럼 이 부분이 되려 더 시혜적인 관점일지도 모르나 그의 선택은 적어도 미셸을 자신의 부속물로 흡수하는 결과를 부르지 않았단 점에서 다행스러웠다. 미셸은 그가 집필한 책에 멸종한 신으로만 기록되는 데 머물지 않고 직접 고립의 신전을 걸어 나와 인간이 되었으니 둘의 우정은 적어도 일방적인 기울어짐이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샤덴프로이데가 미셸의 고립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손바닥만 한 휴대폰 모니터로만 보는 크림 구름성 아래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행에 즐거워할 것이란 단정은 타자화에 의한 일반화의 오류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을 그로미셸 바나나로 만드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나는 바나나다.”라는 제목은 자조적이긴 해도 장애가 불행이 아닌 아마디스의 딸과 불행을 우월함의 대가로 여기던 미셸이 동등한 인간이 되었다는 선언이 아닐까.
빈센트와 유진은 서로 열성, 우성 가릴 것 없이 동등한 인간임을 보여주지만 그 네러티브 방식은 소통이 아닌 증명을 통해서다. 때문에 경쟁에서 패해 은메달에 머문 자신을 자조하는 유진과 우성인자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빈센트는 진정한 의미에서 동등해질 수는 없었다.
약간 닮은 듯 영 반대편으로 향하는 영화와 단편 소설의 교차지점이 우생학에 희생되는 우성인자 아이와 그걸 벋어나려는 열성인자 영웅 – 심지어 아마디스라는 이름조차 문학 속 영웅이라 한다- 이란 점은 퍽 재미난 사유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사회는 변할 기미 없이 그저 개인적 희망만을 남긴 ‘가타카’에서 희생자 유진이 행복한 끝을 맺는 것으로 그려진 반면 사회적 변화 가능성이 큰 ‘나는 바나나다’의 세상에서는 미셸이 자신의 불행과 절망을 직시하며 그것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최후를 암시한다. 두 우생학의 아이 중 누가 과연 행복하고 불행할까. 어느 세상이 더 희망차고 절망적일까.
신에서 인간이 되기로 결정한 미셸과 영웅신화 서사에 꿈 한 줄을 보태기로 한 유진. 둘 다 아름다운 인물로 기억되리란 점에서 최소한 독자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