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팟, 《나는 바나나다》
바나나우유를 좋아한다. 지난 생일에는 바나나우유 기프티콘만 63개를 받았다. 나는 바나나다. 그러니 나에게 아주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그런 쉬운 마음으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글이었음을 ‘FAAH 유전자’를 마주한 후에야 깨달았다. 이거 진짜 있는 유전자야? 약대생 친구에게 물었더니 응, 하고 답한다. 세상에. 그럼 아난다미드도 진짜 있는 거야? 응. 헐, 완전 본격적이네. 미치겠다.
아빠와 그런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대학에서 과학을 배우는 모든 이과생에게 글쓰기 수업도 같이 시켰으면 좋겠어. 그럼 하드 SF가 쏟아져 나올 텐데 말이야! 물론 그때 말했던 SF란 조금 더 우주적이면서 더 많은 배경과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브릿지에 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는 책갈피 기능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내가 이 글의 리뷰를 쓰게 될 것 같다!’라는 강렬한 기분이 드는 순간부터는 캘리로 적고 싶은 부분을 책갈피로 표시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저택이라는 하나의 배경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도 몇 되지 않아 손가락 다섯 개만으로도 충분히 셀 수 있다. 책갈피는 9개를 했다. 12p, 13p, 56p, 61p, 107p, 167p, 231p, 251p, 253p까지 아주 고르게도 분포한다. 최종적으로 내가 펜을 들도록 부추긴 것은 FAAH 유전자의 충격이나 배경이 적은 SF라는 새로움, 혹은 리뷰를 써야 한다는 강렬한 기분이 아닌 이 균일함이었다.
“글쎄요. 나는 백번 말해도 당신이 속한 절반의 사회는 듣지 않더군요.”
온도가 일정한 글은 안정적이지만 역동적이지는 못하기 마련이다. 대신 이 작품이 선택한 것은 바나나라는 재미있는 요소와 사회적 계급이라는 현실의 문제다. 소설이 진행되는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은 범위의 시간을 다루고, 두 인물의 입으로 인류를 말하고, 그 안에는 현대 사회의 고민과 갈등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반영되어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바나나로 압축해서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그 과정이 겉으로 역동적이지는 않을지언정 참 탄탄하고 단단하다고 느낀다. 253p의 마지막 책갈피 부분을 캘리로 옮긴 것은 이렇게 튼튼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작가와 사회가 냉소적으로 대하던 대상이 개인 혹은 소규모의 집단에서 인류라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규모로 확장된 부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디 내가 이 확장에서 받을 수 있었던 신선한 충격을 많은 독자분이 즐기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 맞춤법은 작품을 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