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달린 사족: 원하는 사람 – 주로 연인 – 에게 원하는 ‘콩깍지’를 씌워 바라볼 수 있는 세상. 증강현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미래도 아니다. 주인공 역시 연인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포르노 배우들의 필터를 씌워 바라보며 그것이 연인을 더 사랑해줄 수 있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람의 시선을 왜곡하는 ‘콩깍지’ 앱은 어느 순간 어긋나 작동한다. 주인공의 제한된 시선을 통해 디스토피아(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를 바라보는 경험이 즐겁다. 다소 도식적이어서 소설이기보다는 사회과학이론의 예시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런 서술이 건드리는 문제적 이미지는 그 이상으로 흥미롭다.
읽어보시길 추천드리는 작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시선의 문제
콩깍지 앱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주인공 윤성은 콩깍지 앱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왜곡된 채인 것을 발견하지만, 우린 그것이 콩깍지 앱이 존재한 적 없는 지금 현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이미지까지 바꾸어 주는 콩깍지 앱은 이미 많은 사람이 타인에게 행하고 있는 폭력을 용이하게 만들어주며 “당신의 판타지는 소중하니까”라는 빛깔 좋은 명분까지 제공할 뿐이지요.
어느 순간부터 관객들은 영화를 볼 때 자신이 선호하는 배우의 필터를 착용하고 영화를 감상했다. (중략) 영화의 사후 연출은 관객의 몫이 되었다. 이중으로 설탕을 덧입힌 사탕은 두 번 달콤했다.
콩깍지 앱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영화에 삽입하고 소비하는 모습은 관객들의 자유도가 높아졌을 뿐 현재의 관객과 시청자들이 영화, 드라마를 보는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특히 자본이 들어가는 영상물은 – 장르에 따라 차이는 크지만 – 관객이 원하는 바에 걸맞게 배우를 활용하고 관객은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혹은 영화가 제공하는 판타지를 선택해 소비합니다. 수많은 영상물들이 새로운 시선을 캐내고 발굴하는 작품이 되기보다는 관객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더 많은 사람의 취향에 걸맞을 수 있게 만들어집니다. (그 영화들이 거꾸로 관객의 판타지를 형성/조작/통제하는 면모도 있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할 말이 정말 많아질거예요.) 콩깍지 앱은 이미 관객들이 영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강화시켜줄 뿐입니다.
연예인이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적용하는 시선의 매커니즘 역시 마찬가지. 윤성은 연인 지유를 사람으로 존중하기 이전에 판타지의 재료로 활용하고, 자신의 판타지가 충족되고 있는 상태에 대한 만족을 지유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상대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하는 태도는 안타깝게도 SF 아닌 현실에도 만연하지요.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 외에 모든 것을 객체로만 파악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온갖 형태의 폭력이 얼마나 자주 일상생활을 침범하는지 생각해 보면, 콩깍지 앱의 필터는 기술적으로 구현되지 않았어도 이미 수많은 사람의 머릿속 인식체계에 씌어 있는 것 같습니다.
2. 지유의 목소리와 윤성의 자기반성
윤성의 시선을 통해 콩깍지 앱의 이런저런 면모를 보여주던 작품은 앱의 의문투성이 오작동을 기점으로 주인공은 각성(?)하고 연인 지유는 윤성을 떠납니다. 윤성의 판타지 재료로 활용되던, 작품에 있어서도 주인공의 비뚤어진 시선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상태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던 지유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입니다. 주체성의 회복은 언제나 짜릿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끝까지 윤성의 시선 속에서는 지유가 온전한 주체가 되지는 못하는 듯 해 보입니다.
지유는 윤성의 그간 행태가 얼마나 진실되지 못했으며 자신에게 폭력적이었는지 명료하게 쏘아붙이고 떠납니다. 윤성은 신기하게도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렇다. 나는 그녀를 계속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타인의 몸을 탐닉하며 내가 만든 판타지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진심으로 반성했다.
그 후, 지유는 살을 빼고 한동안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내더니 ‘한남 필터로 살았던 3년’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연애 상담 블로그를 개설해 젊은 에세이스트로 데뷔했다. (중략) 실제보다 부풀려진 개그 묘사를 읽으며 극적 과장이라고는 이해했지만 조금 억울한 심정도 샘솟았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자기를 표현해내는 게 대단하고 부러웠다.
지유가 더 이상 폭력적인 관계 속에서 대상화되기를 거부하고 뛰쳐나온 것은 잘한 일이지만, ‘한남 필터로 살았던 3년’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 윤성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읽혔습니다. 분명한 반동이고 반발이며 회복의 첫 걸음이지만, 반발의 대상이 있어야만 가능한 목소리가 과연 지유 본연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윤성이 그런 지유를 보면서 ‘조금 억울하지만’ 그래도 대단하다고 박수를 치면서,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서 도덕적인 만족감을 얻고 있을까봐 괜스레 찝찝해졌습니다. 어쨌든 독자인 우리는 윤성의 시선이 콩깍지 앱 때문에 왜곡되었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상대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투영하는 시선은 사람에게 내재된 것이고 콩깍지 앱은 그를 돕는 수단 중 하나일 뿐입니다. 앱이 사라진 후 자기비판적 사고를 하려는 윤성의 의식의 흐름이 과연 어느 정도로 그의 (자기 자신에 의해 + 외부 시스템의 작동으로 인해) 왜곡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있는가, 의심하면서 읽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 작품이라 오히려 리뷰에 유의미한 별로 담지 못한 것 같기도 합니다. 나중에 몇 차례 수정/추가하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다양한 생각 해볼 수 있게 해 주는 작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