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답이 존재할 수 없는 질문
고등학생 시절 대입 논술 모의연습이나 대학교 입학 후 교양필수로 지정되어 강제로 수강하는 토론 강의 등은, 돌이켜 생각하니, 참 얄궂다. 무슨 대답을 선택하든 질문 자체가 추상적이고 근본적이면서 일견 단선적이라, 어떠한 답을 선택하느냐와 상관없이 항상 구멍과 빈틈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시해놓고, 그 중에서 하나의 입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논하고 술하라니.
가령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라든가 ‘사형제를 존속할 것인가 폐지할 것인가?’, ‘과학은 진리인가 도구인가?’, ‘과학자에게 윤리의식을 요구해야하는가 말아야하는가? – 가령 배아줄기 세포 실험(황우석과 그의 실험결과 조작 사실이 이슈가 되어 떠들썩했던 게 몇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세계는 특정 법칙으로 작동하는가 인간 개인의 의지로 작동하는가?’, ‘안락사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당연한 얘기지만 고교생 또는 학부 초년생 정도의 수준에서 이런 주제들로 토론을 벌이면, 서로 주장하기는 왕성하게 의욕을 보이나 핵심적인 논거에 대해 깊게 통찰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대부분 상대방측이 반론을 제기할 경우 ‘물론 그 부분에선 그런 주장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이러저러한 측면에서…’라는 식으로, 반론을 가장한 자기 주장/논거 되풀이만 반복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당연히, 그 반복 되풀이를 거듭하는 학생 중에는 미숙하되 주장하는 바에 대해 패기만큼은 튼튼하게(?) 품고있던 나 자신도 포함된다.
이런 식의 ‘제한된 상황과 그에 따른 답안 선택’이 사고를 위한 사고 실험일 뿐이라는 허무감을 비교적 일찍 느낀 게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회의론자의 길에 가까워지는 씁쓸한 경우라고 해야할지, 아직도 다소 헷갈린다.
다만 이 헷갈리는 허무감을 직시했기에, 작품과 작품에 묻어나온 저자의 시선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었으리라.
<정의란 무엇인가? (2319년 29판 13쇄)>는, 작중에도 언급되지만, 답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상황 – 즉 딜레마에 대한 저자의 시선/목소리에서 출발한다. 미리 짧게 정리하자면, 이것이 이 작품을 구성하는 핵심 원동력이자,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이 안고 가는 취약점이기도 하다.
2. SF가 조준하는 과녁
영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을 그려낸다. 이제 영화에서 상정한 미래를 넘겨버린 지금, 영화에서 상상한 미래의 도구들은 현실화되거나 혹은 어느 정도 비슷하게 구현되었다. (타임머신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 시리즈에서 상상하지 못한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작은 물건 하나가 지금과 그 이전의 생활 양식에 엄청난 차이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백 투 더 퓨처>는 미래 사회의 가장 큰 요소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영화에서는 무려 타임머신까지 등장하지만, 정작 전화를 걸기 위해서는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지금의 현실에 비춰보면 피식 잔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 그뿐인가. 콜린 윌슨의 SF소설 <정신기생체>는,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에 나오는 요소를 일부 차용하면서 동시에 이미 우주까지 진출해있는 미래 인류의 모습을 그린다. 정신으로만 존재하는 외계 생명체와 사투를 벌이는 게 주 내용인 이 소설은, 보편적으로 헬리콥터가 이동 수단이 되어 전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쉽게 만나는 미래 사회를 상정한다. 그런데 정작 헬리콥터씩이나 타고 만나려고 장소와 시간을 조율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연락수단은 집 전화이다. 집 전화로 연락을 걸었는데 상대방이 안 받는다, 그러면 음성메시지를 남기는 게 고작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SF는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과 그 상상의 적중 여부’에 방점이 있다기보다는, 해당 작품이 집필되던 당시의 ‘현재 시선으로 상상해본 미래상’이라고 말함이 더 적절하다는 말이 된다. 과학적 논리 근거가 작품을 쌓아올리는 구성 요소이되 그것이 완성하여 그려낸 결과물은 미래의 모습이 아니요, 현재의 시선을 미래로 옮기자면 이러하리라, 라는, 현재로부터의 상상력이다.
바로 이 부분, 현재로부터의 상상력이라는 점에서, SF는 인류 역사 내내 지속된 난제를 테마로 삼는 것 또한 가능해진다. 인류 내내 지속된 난제는 현재에도 난제이므로, 따라서 미래 세계에도 이것은 여전히 난제로 작용하리라는 상상을, 어색하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SF로 분류되지만 해당 작품이 붙잡은 테마는 인과론과 목적론이라는 서로 다른 두 운명관에 대한 논의, 즉 인류 역사 내내 해결될 수 없는 난제를 테마로 삼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정의란 무엇인가? (2319년 29판 13쇄)>가 ‘트롤리 문제’를 과녁 삼아 SF의 형태로 응시하는 것 자체는 자연스럽다. 또한 작가의 코멘트에서 언급한 것처럼, 트롤리 문제가 마이클 샌델로 인해 ‘다수 대 소수’ 식의 공리주의적 논제로 프레이밍 된 것에 대한 반감을 풀어냄 또한 자연스럽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의 취약한 부분이다. 마이클 샌델로 말미암은 다수 대 소수 구도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정말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 그 자체라는 점이. 그 결과, 주인공 나의 목소리보다 오히려 마이클 샌델 식의 프레이밍으로 접근하고 있는 WR 102의 논거가 더 튼튼하다는 점에서
3. 논거 구축의 무게 배분 – 외침이 외침에 그치는 까닭은
작가가 직접 코멘트로 밝혔듯, <정의란 무엇인가? (2319년 29판 13쇄)>의 창작 동인은 트롤리 문제에 대한 ‘다수 대 소수 구도’ 접근과, 이러한 접근으로 말미암아 상당수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선택을 내리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라고 요약된다.
그러자 마이클 샌델 식의 프레이밍을 대변하는 WR 102의 논리 근거는 문제 될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아예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닌 – 즉 호소력을 갖춘 설득이 구축되는 반면, 주인공 나의 항변은 분명 정당한 이의 제기이지만 그렇다고 WR 102의 프레이밍을 넘어서는 차원에 이르지는 못하는 – 즉 합당한 주장이나 최선이라고 동의하자니 머뭇거려지는 선에 머무른다.
이것은 작품 착상의 단계에서 이 작품이 마이클 샌델의 프레이밍에 철저히 안티테제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필연적인 결과라고 짐작한다. SF적 미래를 배경으로 하였지만 트롤리/기차가 미사일로, 광부들이 과학자로 대체되었으나, 문제 상황을 다수 대 소수 중에 선택해야 한다는 샌델식 접근 구조 그 자체까지 통째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공 나의 외침이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그 외침은 결국 샌델의 프레이밍 안에 갇힌 상태로 발화된다.
그 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것/소수/개인을 무시하는 게 옳단 말이냐?’라는 항변은, 작품을 감상한 모두가 수긍하는 항변이되 그 누구도 그 항변이 WR 102으로 대변되는 샌델식 프레이밍을 넘어선다고, 정서적 차원의 전복까지는 일으키지 못했던 셈이다.
“5명을 살리겠답시고 1명을 죽이겠다는 게 뭐가 영웅이야! 그냥 살인마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 당신이 그 소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데!” 목청이 터지도록. “엘리베이터에 탄 그 1명이 당신이어도 쉽게 자신을 희생하라 말할 수 있냐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주인공의 목소리가 가장 격렬하게 빛나는 이 장면은, 정말로 목소리만 높아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수 대 소수의 선택 문제에 대해, 이런 문제제기를 생각하지 않은 독자는 없기 때문이다. 다수 대 소수의 구도에서 다수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 의식을 몰라서 다수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소설 속에 마련된 정황 자체가 샌델식 프레이밍 안에 구축되어버렸고, 그래서 WR 102는 손쉽게 작품 내에서 정황적 납득을 일으킨다. 주인공 나의 견해는, 이미 WR 102의 태도가 더 우월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래서 WR 102는 특별히 언성을 높이는 대사/발화문이 따로 없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논거를 완성시키는 반면, 주인공 나는 인용된 부분처럼 ‘크게 외치는’ 방식의 대응 외에는 뾰족한 방법을 – 자신의 태도가 이 상황을 돌파해 나갈 방법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작가들이 취하는 편리한 출구가 있다. 인물이 ‘대사를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대사를 통한 외침은 1.설명의 나열과 2.감정 표출에서 멈춤, 이 두 가지의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인물의 내면 목소리 표출=독자의 납득, 이 반드시 성립하진 않기 때문이다. 특히 반대편의 논거가 이미 정황적으로 자연스럽게 완성되어 있을 경우, 그 힘이 미력하다. (개인적으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이 부분 때문이다. 미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의 논리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의 문제를 논리적 설명이 아닌 정서적 납득으로 치환시키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논리적 이해가 정서적 납득으로 전이되는 순간, 설득력은 막강해진다. 헉슬리는 그렇지 못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샌델식 프레이밍에 정면 승부를 건 결과 도리어 샌델식 프레이밍에 갇혔다, 라는 인상을 받았다.
fin. 글을 마무리 지으며…
누군가의 글을 두고 논할 때 개인적으로 조심하고자 할 때가 있는데, 문장이나 전개 상의 부분 – 즉 작품의 기술적 부분이 아니라 주제/테마와 연결된 지점에 대해 면밀한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이라고 느낄 때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2319년 29판 13쇄)>의 경우가 그러했다. 텍스트의 구성 상태를 논하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떠올린 발상/착상/테마 등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겠구나, 라고. 허나 이 부분은 기술적 부분이라기보다는 창작자 각자의 고유한 지점이기 때문에, 선뜻 이러니 저러니 논하는 게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다소 내밀한 지점 – 주제의식에 대한 지점을 중점적으로 다룬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의 주제의식에 나 또한 공감의 뜻을 품고 있기 때문.
어쩌면 사족에 불과하고 다소 주제 넘는 말이 될 수도 있어 또한 조심스럽지만, 차라리 주인공 나의 목소리가 굉장히 무기력해지고, WR 102의 견해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의 받는,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으로 글이 구성되었다면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주인공의 목소리로 다수 대 소수의 프레이밍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다수 대 소수의 프레이밍으로 구축되어버리는 상황을 차갑게 그려버리는 방향을. 오히려 샌델식 프레이밍을 날카롭고 차갑게 그려버림으로써, 글을 읽는 독자가 자연스럽게 그 차갑고 날카로운 프레이밍의 문제 상황을 인식해버리는 방향이었다면, 이라고.
이상, 부족하고 모자라는 점도 있을 것 같은 제 생각을, 부끄럽게나마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렝고 님의 글과 글 속에 있는 본인만의 사색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1인, 이만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