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브릿G에서 혁명을 돌아보며 의뢰

대상작품: 티타임의 마르크시즘 (작가: 밀사, 작품정보)
리뷰어: 이두영, 19년 4월, 조회 211

* 고민 끝에 감상과 소회를 독백하듯 풀어놓는 방식으로 서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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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편의 글과 아메리카노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읽던 언젠가였다. 그의 저작을 다 읽은 것도 아니고, 읽다가 만 것도 여럿이다. 다만 생생하게 기억나는 하나의 ‘순간’이 있었다. 각종 사회적/문화적 현상을 두고, 저자로서의 지젝은 영미/유럽 중심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을 질타하면서 동시에 영미/유럽 지식인 좌파 일련의 시각에도 똑같이 질타를 가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과 이유를 문장으로 전개하는데, 나는 어느새 그 논리에 제법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 전개가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궁금하였다. 얼마 후, 마지막에 이르러 한 문장이, 굵고 선명한 볼드체로 찍혀 있었다. “답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책을 덮고 1분 정도 창밖만 보았던 것 같다. 머리에 생각은 없었고, 가슴에 허한듯 그리고 묵직한듯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방에서 책을 읽던 중이었던가, 카페에서 책을 읽던 중이었던가? 아무튼 책을 읽던 중이라면 평소 습관처럼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을 게다. 아무튼 몇년 전인지도 헷갈리는 그 순간,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그 순간 느낀 형용불가의 무게, 그것의 정체는 낭만감인 것 같다. 나는 별 기대 없이 책을 읽던 도중 너무나도 오랜만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단어를 느닷없이 조우해버렸고, ‘여기서 네 녀석이 나타나다니…!’하면서 놀라움 반, 반가움 반, 이런 심정이었던 게 아닐까.

역사에 남겨진 사례를 찾자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모의 실험’은 일단 실패했다. 혹자는 역사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없었으며, 내가 모의 실험이라고 지칭한 것은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리라. 그 혹자도 나도 누구도, 어느 결론이 정답인지는 입증할 수 없다.

내가 느낀 낭만감은 허무감이기도 한 셈이다.

혹자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질문하며 작은 책자를 냈다. 프롤레타리아트도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략) 그러나 적어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유토피아로의 길을 잇는 가장 강력한 수단일 것이었다. (중략)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작품을 감상하고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인스턴트 스틱 아메리카노를 조촐하게 홀짝거리는 나는 누구인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서발턴. 대강 ‘소극적 아나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어쩐지 비겁해보이기도 하다. 일단 내가 부르주아지가 아니라는 것만 확실히 알겠는데(아아 부르주아지로 태어나고 싶다).

나는 ‘단결하라’ 요청하는 외침에 낭만과 허무를 동시에 느끼니, 그저 “역사의 수레바퀴” 그 자체만을 응시할 따름인 셈이다. 나에게 역사의 수레바퀴 그 자체란, 목적지가 상정된 법칙도 아니요 어딘가로의 해방구도 아니다. 그저 싹이 트고 꽃이 피어 낙엽이 저물고, 앙상하던 겨울 나무에 또다시 싹이 트고 꽃이 피우길 반복하는, 이름 그대로의 수레바퀴 그 자체일 뿐.

주전자에 물을 올린다.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작성할 때에도 커피를 마시는 게 습관이다.

나는 브릿G라는 카페의 서가에서 전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어느 글을 발견하고, 읽고, 그적거리기 위해 커피 한잔을 주문한 셈이다.


2. 금연구역의 흡연자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의 독립 전쟁을 반대했다. 사르트르는 카뮈더러 감상주의에 젖어 있다며 일갈했다. 실존주의 철학을 언급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두 인물은, 그렇게 결별했다.

나는 카뮈를 실존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부라곤 말할 수 없으되 내가 읽은 카뮈의 글은 사르트르 식의 실존보다도 세계에 대한 회의, 환멸에 가까운 회의 그 자체였다. <페스트>도 <이방인>도, 국내 번역서에 첨가된 해설을 읽노라면 카뮈의 태도를 너무 희망적인 시선으로 설명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절대로 반대한다. 특히 <페스트>, 얼마든지 역병은 되돌아 올 것이라는 마지막 서술, 그걸 읽고 어떻게 그리도 희망적으로 해석들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자란 탓일 수 있겠으나, 카뮈는 자신의 작품 제목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라 보고 싶다.

다소 표현이 매끄럽진 않지만, <티타임의 마르크시즘>을 카페 브릿G의 서가 어느 곳에 놓여도 맞아떨어지지 않는 ‘이방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은 카페 브릿G의 서가에서 제공하는 분류, 판타지 서가와 역사 서가 두 곳에 걸쳐 있지만, 비현실적 진술로 점철되어있으되 그 내용은 역사적 현실 그 자체이며. 역사물을 넘어서는 현실의 역사 그 자체이다. 투쟁과 전복의 거듭과 거듭으로 형성된 역사, 그리고 그 거듭된 역사의 전개 논거, 마지막으로 그 논거의 균열된 틈새까지 망라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작품은, 티타임의 향유를 놓고 벌어지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구분이 고정태가 아니라 유동태라는 점,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회색지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발턴이라는 사각지대의 존재를 조망함으로써 혁명의 논리와 그 논리의 무너짐 그리고 무너진 논리가 다시 구축되는 양상 전체를 통틀어서 바라본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프롤레타리아트도 룸펜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서술, 그리고 혁명의 캐치프레이즈나 다름 없어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는 외침, 이 두 가지가 작품을 매듭지음, <티타임의 마르크시즘>에 담긴 시선을 가장 선명하게 해주는 부분이 아닐까. 서발턴의 발언을 또다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로 귀결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였고 역사이며 역사일 것이라는 결론.

서발턴의 발언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로 귀결될 것인가. 귀결된다면, 그 이후의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티타임이 펼쳐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서발턴의 발언’이란 얼마든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으로의 개명 후 단결’이라는 논리로 귀속 될 가능성, 이 점에 대한 상상만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카페 브릿G의 서가 분류 어디에도 맞는 듯 맞지 않는 듯 돌출된 이 작품 <티타임의 마르크시즘>은, 형식상의 측면 뿐 아니라 내용상의 측면에서도, 핵심으로 삼은 테마가 기존의 담론 틀에 들어가는 듯 들어가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내용적인 측면과 형식적인 측면이 상당히 잘 어울린다. 그리고 이런 식의 독특한 글쓰기를 우연히 목격하는 순간은, 독자로서 도서관이나 책방을 산책삼아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 한권의 즐거움처럼, 인상 깊다.

바로 그 독특함이 이 글의 강력한 힘이자 약점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역사 장르물과 궤를 달리하고, 비현실적 서술은 환상성을 논하기에는 판타지라고 말하기보다는 사색적인 현실 고찰의 성격이 짙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의 밑바탕으로 깔린 인류 역사와 담론 지식에 대한 고찰 및 사색 자체가, 아무래도 다수의 독자에게 접근하기 쉬운 글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려움 또한 사실이다.

이 글을 그렇다면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가. 카페 브릿G 서가의 알베르 카뮈라고.

사진을 검색하면 항상 담배를 물고 있는 카뮈. 이제는 따로 스모킹존을 두지 않는 이상 카페는 엄연히 금연구역이다. 이제 카뮈가 카페 브릿G에 들른다 해도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울 수는 없는 일이니, 사실 브릿G 서가에 카뮈 같은 글이 놓일 위치는 온전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내가 2년 가량 금연 끝에 다시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라서 그럴까, 서가에 맞지 않는 이방작이 돌출되듯 꽂혀있는 것 그리고 그 이방작을 읽고 생각하는 것, 이 또한 즐거운 일이지 않은가, 라고 말하고 싶다.

분류되지 않은 서발턴을 위해 서가에 자리 하나 정도는 둘 수 있지 않겠는가. 특히 브릿G라면.


3. 혁명을 생각하며

왕조 전복, 계급 타파, 조직적 시위 등 숱한 운동(movement)들은 단결을 외쳤다. 그 단결은 무력하게 실패하기도 하였고, 강력한 변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동 그 자체가 이유와 집단을 달리하며 계속해서 이어져온 까닭은 무엇인가. 어째서 단결된 운동은 아직도 우리를 유토피아로 안내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새로운 운동을 요구하는가. 운동과 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수레바퀴, 그 자체의 운행은, 이런 생각이 들 즈음 문득 허무해진다.

생각을 슬며시 빗겨서 살펴보면, 그 숱한 운동이 ‘단결’을 외쳤기 때문은 아닐까. 계급이라는 틀은 운동을 위한 응집력 확보에 유용한 도구이지만, 무수히 많은 개별자(individual)들을 부르주아지라는 이름으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으로, 재단해버린다. 서발턴의 발언이 일어날 때, 그것이 ‘서발턴’이라는 ‘분류(category)’로 고정되는 순간, 그 서발턴에서 또한 빗겨난 존재를 우리는 쉬이 상상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 점에서, 서발턴의 발언 문제를 어느 계급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다만 노동자의 단결을 외치는 결말은 시니컬한 듯 정확하고, 비관적인 듯 희망을 바라고 있다.

앞으로의 혁명은 어떻게 이뤄져야하는가? 아니, 혁명이 필수불가결이긴 하는가? 지금에 만족할 수 없으며 따라서 변화를 촉구함이 마땅하다면 혁명은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 혁명이 또다른 혁명의 연쇄 중 하나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쩐지 씁쓸하다.

서발턴이 서발턴 각자의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새로운 혁명으로 꿈꾼다면, 지나치게 어려운 가능성을 다소 낭만적으로만 꿈꾸는, 몽상적 발상일까? 그러나 가장 낭만적으로 꿈꾸고 싶은 혁명이, 적어도 <티타임의 마르크시즘>을 감상하며 느낀 나에게는, 서발턴이 서발턴 각자의 목소리로 발언하는 그 모습이 내가 바라는 혁명의 모습에 제일 가까운 듯하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결된 이름이 아니라, 서발탄 각자가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연대하는 것.

단결과 연대는 또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깊이 있게 따지자면 이견은 다양하리라. 허나, 특정한 계급 특정한 위치로 집단을 나누고 집단 대 집단으로만 혁명을 상정하는 것이 정작 살아있는 각각의 사람 하나 하나, 개별자들을 망각하는 경우를 역사에서 쉬이 볼 수 있는 바, 혁명이라는 단어가 낭만적인 뉘앙스가 다분하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인 그림을 꿈꾸는 게 마냥 허황되진 않으리라 믿고 싶다. 내가 읽은 <티타임의 마르크시즘>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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