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비평

대상작품: 오후 세 시의 벚꽃 (작가: 반짝, 작품정보)
리뷰어: 유이남, 19년 4월, 조회 568

누군가는 문학이 창이라고 합니다. 시대의 경계를 들추고 우리 의식의 밑바닥을 까발리는 것이 문학의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 썩은 곳, 지저분한 곳을 등대처럼 비추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권력의 목에 창날을 들이대는 아방가르드한 태도야말로 문학가의 바른 자세라 말합니다.

반짝님이 브릿G에 남겨 주신 두 편의 소설을 모두 읽었습니다. 「취중진담」을 먼저 읽고 「오후 세 시의 벚꽃」을 나중에 읽었습니다. 두 편의 소설로 ‘반짝’이라는 작가에 대해 논하기는 너무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소설 간의 공통점 정도는 짚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1.
우선은 여성 인물이 초점인물로 등장하네요. 이 여성 인물은 무언가 상실을, 상처를 경험한 인물입니다. 「취중진담」에서 ‘가은’은 쓰레기같은 남자에게 차이다시피 이별하고, 「오후 세 시의 벚꽃」에서 ‘진아’는 이유가 불분명하지만 무언가 큰 상처를 경험한 것 같아 보이지요. 두 인물의 반응을 토대로 여성 인물이 겪은 상처의 성격을 살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가서 혼자 살겠다는 진아에게 오빠는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왜 널 알던 사람들이 네 처지를 비웃을 거라고 생각해? 아는 사람들 만나기 싫어서 이사 가는 게 말이 되니. 평생 그렇게 도망치면서 살 거야? 진아는 웃으면서 스스로에게 비수를 꽂았다. 응.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도망치며 살래. 그게 내 소원이야. 머리로는 오빠의 말이 다 맞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어떡해.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걸. 참을 수가 없다고.
(오후 세 시의 벚꽃)

그리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가은은 자신의 오랜 신념을 철회했다.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 잘생긴 놈들은 얼굴값을 한다. 확실하다. 반 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와서 눈물 콧물을 줄줄 쏟으며 열변을 토하는 가은에게 친구들은 조금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너 얼굴값 한다는 말 싫어했잖아. 잘생긴 사람이 성격 더러운 건 그냥 질투심 섞인 편견에 불과하다며. 가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편견이 아니고 합리적 추론이야.
(취중진담)

어떤 인물이 자신과 대립하는 인물이나 사건과 만났을 때 갈등은 시작됩니다. 갈등이 낳는 결과는 두 가지입니다. 해당 인물을 규정하던 동일성이 지켜지거나, 무너지거나. 다시 말해 변하지 않거나, 변하거나. 어느 쪽이 특별히 좋다고 얘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커티스 에버렛(크리스 에반스 扮)이 열차의 머리칸에 도착했을 때 그의 동일성은 붕괴되지만, 그걸 무턱대고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요.

‘가은’과 ‘진아’는 갈등을 겪으며 동일성이 무너진 인물들입니다. 가은은 “자신의 오랜 신념을 철회”한 인물이고, 진아는 “알던 사람들이 처지를 비웃을 거라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둘 모두 세계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네요. 앞서 말한 것처럼 이게 반드시 좋다, 나쁘다, 라고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두 인물은 이를 통해 커다란 좌절을 맛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반짝님의 두 소설 속에서 여성 인물들이 겪는 동일성의 붕괴는 상당히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이야기하자면 가은과 진아가 겪은 갈등은 ‘특정한 대립자’와의 갈등이 아니라 ‘세계’와의 갈등이 아닌지요. 그러나 세계와의 갈등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물이란 없으니까요. 아니, 승리는 고사하고 승리의 가능성조차도 타진할 수 없는 경우가 지배적이죠. 다시 말해 가은과 진아가 겪은 상처는 ‘세계’와의 대립과 그로 인한 좌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
이를 서술하는 소설의 형식이 참 인상적입니다. 가은과 진아는 서술의 초점 인물이긴 하지만, 초점 ‘화자’는 아닙니다. 사실 전부 가은과 진아의 이야기면서, 서술자는 결코 이들을 ‘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술자는 꼬박꼬박 ‘가은’, ‘진아’라는 이름을 불러 가며 인물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당연한 물음에 진아는 유니폼 조끼를 잡고 흔들어 보였다. ‘눈이 달려 있으면 알 거 아니야’라는 의미가 내포된 행동이었다. 방금 전까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던 진아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나 편의점에서 일한다. 취직을 못 해서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아. 그런데 뭐 어쩌라고.(오후 세 시의 벚꽃)

식도가 홧홧한 게 어째 생명이 깎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짜증나는 인생. 그냥 마시고 죽지 뭐. 불현듯 가은은 시야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아챈다. 효과가 참 빠르게도 나타나는 소주. 알코올, 아마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정직한 존재일 거야. 얼마나 좋아. 마시면 취한다는 간단한 공식이.(취중진담)

그러나 이 거리감은 인물의 감정이 고조되는 바로 그 순간 순식간에 좁혀집니다. 가은과 진아를 3인칭화하던 서술은 어느 새 “그래, 나 편의점에서 일한다.”, “짜증나는 인생. 그냥 마시고 죽지 뭐.”라며 1인칭화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술과 인물 사이의 거리감이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일부러 인물을 객관화하며 거리를 두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객관화를 유지하지 못하는 모습. 그리고 애써 다시 거리를 두려는 모습. 다시 말해 가은과 진아는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세계의 시선(적어도 세계의 것이라 생각되는 시선)을 경유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본인의 동일성이 무너져 버렸으므로 ‘나’라는 선언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가은’과 ‘진아’라는 자의식은 순간순간 고개를 듭니다.

논리적 불가능성으로 포용할 수 없는 감정의 편린이 처절하게 비어져 나오는 순간입니다. 인물의 비극성을 절절하게 표현하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까요.

 

3.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남성인물입니다. ‘윤혁(오후 세 시의 벚꽃)’과 ‘술집 주인(취중진담)’ 말입니다. 이들은 상당히 미스터리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입니다.

진아는 윤혁이 하는 말과 행동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을, 이 년이라는 시간을 윤혁은 없는 것처럼 침범해 거침없이 다가왔다. 침을 한 번 샄킨 진아가 왜, 하고 물었다. 윤혁은 말이 없었다. 그저 진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기 어려운 눈빛이 진아를 조급하게 했다.(오후 세 시의 벚꽃)

문득 가은은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치자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받아준다. 조금 당황한 가은이 먼저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 황급히 물을 마신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가만가만 기억을 되짚는다. 영업시간이 끝나 손님이 없는 술집. 빈 테이블을 치우고 바닥을 닦던 종업원들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주정을 늘어놓는 취객과 참 다정히도 헛소리를 들어주는 주인.

윤혁과 술집 주인의 미스터리함은 한 마디로 말해 ‘당신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라는 미스터리함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 기대하던 모습에서 어긋나 있는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진아는 앞서 ‘알던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웃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윤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은은 ‘잘 모르는 사람은 연애 상대로 좋지 않다’라고 다짐했으나 술집 주인은 이를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가은과 진아가 이들에게 부여했던 ‘기대’란 자의적인 것이었음을 짚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가은과 진아는 동일성의 붕괴를 경험하였고 이로 인해 세계의 시선을 통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은과 진아가 윤혁과 술집 주인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세계를 경유한 것입니다. 자연스레 가은과 진아는 이들을, 자신에게 상처를 안겨 준 세계와 동일시합니다. 너희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럴 거지, 라고요.

그러나 남성 인물들은 여성 인물이 그들에게 부여한 기대를 저버립니다. 이는 세계를 경유한 논리가 틀렸음을, 세계의 시선을 통한 상황 인식이 사실 불가능했음을 폭로하는 일입니다. 윤혁과 술집 주인은 동일성을 잃고 외부적 논리에 굴종하던 여성 인물들에게, 파괴되었던 그녀들의 동일성이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 줍니다.

 

4.
정리하면 반짝님의 「오후 세 시의 벚꽃」과 「취중진담」을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세계와의 대립으로 인해 자기동일성(정체성)을 잃고 부유하던 여성 인물이 남성 인물을 만나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는 이야기. 이걸 뭐라고 부를지는 독자들 나름일 겁니다. 구원 서사. 존재론적 신데렐라 스토리, 성별이 반전된 무진기행, 등등.

요컨대, 참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요즘’같은 세상에 말입니다. 누군가는 낡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서두에 말했던 대로 ‘새로움’이 문학의 역할이라면, 이 소설은 제 역할을 못하는 아주 무딘 창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 반짝님의 소설은 너무나도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반짝님의 소설이 좋습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도 반짝님의 소설에 매력을 느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어쩌면 반짝님의 소설이 우리가 ‘새로움’에 매달려 소홀히 했던 지점,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면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반짝님의 소설은 말 그대로,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반짝님의 창작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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