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의 검 공모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잿빛 하늘의 검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Campfire, 19년 3월, 조회 231

흔히 소설의 기능으로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삶을 체험’한다는 식으로 말하자면 ‘경험’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경험’은 좀 더 좁은 영역에서의 경험, ‘타인의 경험’이다. 예시를 들어 설명하자면 ‘저자의 의도를 읽으라’는 식의, 독자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과 더 나아가 그 소설을 쓴 저자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서 저자와 저자의 삶, 그리고 저자가 느꼈던 저자 주변인물의 삶을 포함한 총괄적인 부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것이 쌓이면서 범위를 넓혀갈 때 특정지을 수 있는 광의의 저자, 즉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비문학 쪽도 포함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도 전문서적도 결국 배움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독서는 성현들도 권장하는 일이고,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이 말했던 독서에 대한 잠언들 또한 자주 회자된다. 어찌보면 단순히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을 이토록 권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노벨상은 인류문명 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인데도 거기에는 문학상 부문이 따로 있다. 문학이 인류문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견지에 나온 취지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 문학의 기능 중 하나가 ‘타인의 경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경험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함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장에도 서서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건 재미도 물론 있겠지만 고차원적인 영역에서 말하자면 인격의 완성을 향한 가장 보편적인 길 중 하나다. 즉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란 논어의 말과도 같고,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성경의 구절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요지는 ‘타인을 생각하는 것’이다. 소설의 기치도 이런 면을 보인다. 소설에서 상류층의 삶보다 하류층의 삶과 마이너리티를 다루며 사회비판과 현실의 민낯을 비추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지만 이런 글은 읽기 힘들다. 논어에서도 이르길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면 70세에 그것이 완성된다. 그만큼 험난하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지 이타적인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다른 ‘타인’에게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힘들다.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할 뿐,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내가 너를 사랑한대 해서, 썩어가는 생선 비린내와 섬뜩한 청거북의 모가지를 사랑할 수는 없다.'(이성복,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 中) 이란 말처럼, 왜냐하면 이타심은 이기심의 반대가 아니라 그걸 포용하는 상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이타심을 가진다면 전쟁도 없고 다툼도 없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이해했을 때가 문학의 종말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어쨌든 일반문예 쪽은, 말하자면 ‘문학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지만 아마 위의 이유로 웹소설은 그런 순수를 버리고 개인의 이기심을 충족하는 쪽으로 빠진 게 아닐까 싶다. 모든 웹소설을 순수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표면적으로 보이는 경향만을 보자면 웹소설은 딱히 그런 문학으로서의 순수를 추구하는 장르로 보이진 않는다. 소위 말초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작품을 그래도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이념을 가진 작품들과 동급으로 놓는 건 후자에게 미안한 일이다. 둘 다 의사라고 쳐도 전자는 환부에서 눈을 돌리고 진통제만을 처분해주는 의사일 것이고, 후자는 똑바로 상처를 직시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의사 정도의 차이로 비유해보곤 한다.

흔히 ‘좋은 글’이란 표현은 후자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겠지만, 나는 이 작품처럼 무척 쉬운 글도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쉬운 글이란 동화같은 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앞서 말햇듯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한다’, 이건 흔히 쓰이는 말로 교체하자면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을 기피하고 익숙한 것을 보려는 건데, 이런 성향은 사실 소설의 함정이겠으나 소설의 매커니즘과 몹시 잘 들어맞는다. 만약 소설이 작정하고 독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면 거기에는 ‘타인’은 없을 텐데, 그렇기에 이는 인류의 상위에 속한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이타적인 경지 대신에 인간의 보편적인 이기심을 생산소비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가장 내밀한 것은 피부다’라는 말도 이 논지에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런 경지에 이를렀을 때(혹은 이런 지경이 되어버렸을 때) 소설에는 무엇이 남는가. 어려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들 경험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때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 사라지고 ‘자신에 대한 공감’만 남는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공감하는 것에 비하면 익숙한 것에 공감하는 건 너무나도 쉽다. 그렇다. ‘쉽다’. 쉬운 글이다. 이 작품은 노골적일 정도로 쉽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쉽다’는 표현은 부정적으로 보일 만하며,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니 웹소설이 일반문예와 같은 선상에서 논해지지 않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제까지 줄줄이 부정적인 맥락으로 써낸 것에 비하면 저 표현과 저런 글을 싫어하지 않는다. 저런 것은 오히려 장점이다. 내 생각에, 쉬운 글은 어디서나 돋보인다. 이 작품은 컨셉이 확실하고 장단점이 명확하며, 서너 편만 읽어도 독자가 그걸 눈치챌 수 있다. 즉, ‘초반만 참고 보면 재밌다’라는 식으로 긴가민가한 게 아니라 취향이 맞다면 (서장은 제외하고)1, 2화부터 재미를 보여준다.

그래서 편집자의 추천평-

‘2,000매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낯선 판타지 세계관임에도 도입부의 장벽이 낮고

사건의 전개를 통해 온갖 군상과 유려한 감정선을 잘 드러내며

다양한 여성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희망으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에서도 ‘도입부의 장벽이 낮’다는 표현을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조아라에서 먼저 연재되어 거기서도 인기가 있었고, 브릿지에서도 첫 연재니 전혀 다른 두 사이트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했는데도 두 곳 모두에서 큰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도 저런 쉬운 접근법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취향만 맞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테니 한 번 손대보기에 나쁘지 않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앞서 장점을 말했으니 단점을 꼽아보자면,

-장점이자 단점인데, 내용에서 흥미로움이 받쳐주다보니 장문의 문장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묘사고 뭐고 빨리 다음 전개로 넘어가! 라는 느낌인데, 이런 케이스가 드물지 않다. 이럴 때 만화판이나 드라마판이 있으면 나는 그쪽으로 갈아타기도 한다. 이 작품도 코미컬라이즈화 한다면 더 성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이다패스물, 갑질물을 싫어하는 사람이면 많이 거부감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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