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에피타이저
대학 시절 철학과 강의를 종종 들었다. (철학과 학생들이 듣는 전공 강의말이다.) 딱히 복수전공도 부전공도 아니었고 취업에는 일할반푼도 도움 될 리 없지만, 그냥 좋아서 들었다. 그런데, 졸업할 즈음이 되어 되살펴보니, 내가 수강한 철학과 강의는 서양 철학보다 동양 철학 강의가 더 많았다. 철학과에서 개강해놓은 동양 철학 관련 강의는 죄다 들었던 것. (이는 뒤집어서 생각할 경우, 동양 철학 강의의 수가 서양 철학보다 상당히 적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고등학생 시절 대입 논술을 준비하면서도 느낀 점이었지만, 서양 철학이 ‘정확하고 이해는 되는데, 딱딱하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동양 철학은 ‘부드럽고 편하게 들리는데, 뭔가 아리송하다’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타과 소속 학부생으로 철학과 강의들을 들으며 느낀 인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확실히 그렇군’이라고 혐의가 짙어졌달까.
도가철학 수강 첫날, 교수님이 했던 이야기는, 여러번 음미해볼 말씀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우리는 (한국인이라) 동양 관련 사상들, 단어들에 막연한 가까움을 느끼지만 정작 노자나 장자의 이야기를 난해하게 느낀다. 오히려 플라톤의 철인 정치라든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헤겔이 제시한 정반합 구조, 마르크스의 유물론 등 서구 철학과 사상의 개념, 단어들에 더 익숙하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더 잘 납득한다. 동양 사상, 개념에 대해 우리는 막연한 익숙함을 가지지만, 정작 그것들이 제시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면 서양의 개념보다도 낯설고 난해하게 느낀다.“
실로 그렇다. ‘도를 도라하면 진정한 도가 아니니라’ 하는 소리를 들으면 이게 뭔가 있음직한 소리로 들리기는 하는데 그럴싸한 궤변인지 뭔지 파고들면 난해해진다. ‘무릇 선비는 자신의 명을 알아야 한다’라고 공자가 말하는데, 이게 그래서 운명이 결정되어있다는 건지 공자가 운명결정론자였다는 건지 그런데 그건 또 아닌 것은데 좌우긴 도대체 뭔 뜻으로 공자가 이런 소리를 한건지, 헤맨다. 도(道)라는 건 도대체 뭐고 명(命)이라는 건 도대체 뭐길래?
우리에게 익숙한 듯하지만, 막상 파고들면 낯선 동아시아 사상의 개념들.
‘협(俠)’이 그러하다. 협, 그게 뭔데?
1. 협(俠)은 남성주체의 전유물인가?
나에게 무협은 익숙한 듯 낯설다. 무협의 숱한 클리셰는 쉬이 듣고 접했지만, 막상 제대로 완독한 무협지 자체는 손으로 꼽을 것 같다.
무협의 ‘무(武)’는 이해가 쉽다. 공중을 걸으며 손끝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신이한 기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무술, 무예 등을 통해 뛰어난 능력/힘으로서라는 뉘앙스로 ‘무’라는 글자를 어느 정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힘과 능력이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하고 신이한 모습을 구사할 때, ‘판타지’의 느낌도 얼추 엿보인다. 그러나 판타지와 무협은 다르다. 서양과 동양이라는 식으로 구분할 순 없다.
판타지는 ‘환상적인(fantastic)’ 것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반면, 무협은 신이한 능력으로서의 ‘무’에다가 ‘협’이라는 것이 가미된 장르임을 이름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판타지와 무협이 구분된다면, 그것은 강호라는 배경이라든가 무술에서 출발한 무공이라든가 하는 외견상의 요소들이 아니라, ‘협’이라는 논리를 담고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로 구분 될 것이다.
문제는 ‘협(俠)’이다. 무는 그렇다고 치고, ‘협’은 그러면 무슨 개념이란 말인가?
“무협지 100개 중에 99개는 아버지 원수 갚는 이야기.” 중고교시절 국어시간이면, 어느 국어선생이라 구분 할 것도 없이, 다들 한번 이상은 농담삼아 이런 말을 하였다. 하긴, 공자도 같은 하늘 아래에 원수와 살 수는 없다하여 ‘불구대천지원수’라는 말이 생겼지 않은가. 농담으로 쓰일 정도면 실로 원수 갚는 이야기가 장르로서의 무협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
따라서 ‘협’을 이해함에 있어, ‘복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리고 가족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 손쉽게 발생할 복수는 ‘가족의 원수’를 척결하는 것이고, 특히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아들’ 캐릭터가 다수(사실상 대부분) 발견됨은 가부장중심 가족구성에 뒤따른 현상이라고 자연스럽게 추론 가능하다.
복수와 함께 동반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보은’: 은혜를 갚음이다. 주인공의 아버지에게 큰 은혜를 입고 ‘당신의 자손에게 위기가 있거든 내 기필코 당신께 받은 은혜를 갚으리다’하고 맹세한 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순간 몸을 던져 사악한 악당에게 마치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던 인물인양 갈고 닦은 단 하나의 비기로 악당에게 치명타를 날리고 자기 자신은 장렬이 전사, 주인공을 구해내는 조력자 캐릭터.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의 저서 <아웃라이어>(‘1만시간의 법칙’을 제시한 바로 그 책이다.)에서 흥미로운 발견을 들려준다. 문화권마다 ‘자비/용서’를 선호하는 문화와 ‘복수/응징’을 선호하는 문화로 갈리더라는 것. 전자에 소속한 사람은 복수와 심판의 가치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비와 용서를 선호하며, 후자에 소속한 사람 또한 자비와 용서의 가치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복수와 응징을 선호하더라는 것이다.
무협이라는 장르는 중화권이 응징과 심판을 선호하는 문화권에 가깝다는 증거이다. 확실히 무협의 논리는 ‘권선징악’하여 ‘사필귀정’함이니, 이는 중국 특유의 ‘꽌시’(호의는 받은 만큼 보답해주고, 손해는 당한 만큼 되갚아준다) 문화와 통한다.
응징과 심판은, 올바름과 삿됨을 엄격히 구분하고 이에 맞게 ‘공평한 분배’를 보상과 처벌로 실천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무협이 복수라는 소재를 서사의 주된 요소로 삼지만, 이와 함께 ‘보은’이 뒤따라 동반됨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복수와 보은’은 ‘당한 것은 되갚고 받은 것은 보답한다’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며, 양자는 따라서 자웅동체인 셈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협(俠)’이란 복수와 보은으로 구성된 공평정당한 심판이라고 바꿔말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 심판은 무공이라는 이름의 힘을 동반한다. 이 논리가 성립됨과 되지 않음이 ‘무협지’와 ‘판타스틱한 것’을 구분하는 척도인 셈. (‘협의 논리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좌절하는 비극’의 이야기는, 고전 무협의 논리가 현대에 접어들며 파생된 ‘이형태의 무협’이라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협이라는 개념은, 동북아 문화권에서 권하는 다섯 가지 덕목 –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 중 ‘의(義)’와 함께 맞붙는다. ‘의협심이 강하다’는 식의 표현은, 협과 의가 서로 잘 통하는 개념임을 보여준다. 온갖 고초를 겪는 와중이지만 오로지 ‘의(올바름, 뜻)’을 실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그리고 비로소 그 뜻을(즉 ‘의’를) 실천으로 보여주어 완성하는 것, 그것이 ‘협’이다. 그리고 그 올바름의 핵심이 ‘복수’와 ‘보은’ – 당한 것은 되갚고, 받은 것은 보답함이다.
자, 이쯤 되니 살짝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무협에 대한 막연한 인상은 으으리으리하신 이분이 풍기는 이미지, 그것과 유사하다. 협의 논리를 대입시켜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불굴의 정신! 못 먹어도 고! 너와의 의리를 위해서라면 힘을 불끈! 으으리! 상남자의 의협심을 CF마다 불 태우시는 이분의 모습(……)과 무협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잘 붙는다(쩝). 그럴만하다. 앞서 말했듯,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당신의 아버님께 받은 은혜’를 몸바쳐 보답하는 협의 논리는 가부장중심 가족문화권에서 탄생했으니까. 무협이 남성주체를 주인공으로 하여 서사를 진행함 또한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여기서 집고 넘어갈 게 있다. 협의 논리가 가부장중심 가족공동체 문화에서 발생했지만, 그 중심인자가 ‘복수와 보은’이라고 본다면, 이는 남성주체가 아니라 여성주체라하여도 ‘복수와 보은’을 설득력 있게 성취할 경우 ‘여성주체 무협’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추론이다.
이를 더 확장시켜 말하자면, 가부장 사회에서 발생한 남성중심의 각종 서사 플롯들이라 하여도, 플롯 내부의 논리가 설득력 있게 재구성되면 ‘여성주체가 주인공인 이야기’로 탈바꿈 될 수 있다는 (어마무시하다면 나름 어마무시한) 결론이 도출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있으니, 아미르 칸이 감독한 영화 <당갈>이다.
2. 이런 아버지라면 인정할 수 있다.
<당갈>은 나름 흥행과 호평을 모두 받은 영화인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던 아버지(감독 아미르 칸이 직접 출연)가, 미래에 태어날 아들이 레슬러가 되어 본인이 이루지 못한 금메달을 꿈을 이뤄주기를 소망한다. 허나 아들은 개뿔, 딸만 둘이나 생겼다. 금메달의 꿈을 포기한 아버지. 그런데, 어느날 두 딸이 동네 사내아이들을 힘으로 쥐어패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이쯤되면 예상하셨으리라. 그렇다, 아버지는 ‘어, 우리 딸들이 레슬링을 하면 되는 거잖아…?‘하고 확 정신이 깬다. 그날 이후 동네사람들한테 정신나갔다는 소리 들으면서 딸들에게 레슬링 가르친다. 화장하고 치장하길 좋아하는 두 딸. 레슬링을 가르치려는 아버지. 불화는 안 봐도 뻔하다. 갈등이 마련됐으니 이제 잘 풀어내기만 하면 된다.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다만, 영화가 나름 설득력 있는 서사를 구축했다는 점만 밝히겠다.
국내에도 개봉한 바 있으며,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호평과 찬사를 받은 영화다. (물론 개중에는 박한 평가도 있는데, 이는 자연스레 후술할 것이다.) 본인도 재밌게 본 영화이다. 동시에, 한편으론 난제를 안겨준 영화이기도 하다.
하나, 영화는 좋았다. 여성관객들의 지지가 이해, 아니 공감되었다.
둘, 그런데 사실 이 영화의 서사 구조는 새롭거나 신선하지 않다. 오히려 전형적이고 익숙하다. 주인공 두 딸을 아들로 바꿔보면 답이 간단하게 나온다. ‘아버지의 못다한 업을 아들이 계승하여 마침내 성취하기에 이른다’라는 서사. 바로 이 익숙한 서사에서, 단지 자식의 성별을 아들에서 딸로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 나도 재밌게 봤고 여성관객들의 호응도 좋았다.
전형적인 부자상속 서사, 특히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가 익숙히 봐온 모습, ‘완고한 가부장’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말하지만 나도 재밌게 봤고 여성관객들의 호응도 좋았다. 영화에 박한 평가를 내린 소수 의견들은 바로 이 지점, 부자상속 플롯과 전형적인 가부장 캐릭터를 발견해낸 사람들이었다.
허나 대다수의 목소리는 호감 일색. 가장 나를 ‘헉’하게 했던 건, 이 영화에 달린 별점 5점을 주며 어느 여성분이 남긴 한줄평이었다.
“이런 아버지라면 인정할 수 있다.”
3. 여성주체의 변용은 무궁무진, 관건은 설득력 구축
이런 아버지라면 인정할 수 있다니, 조금만 다르게 보면 얼마든지 별로인 아버지인데!? 영화에 대한 ‘호감’과 부자상속 서사라는 ‘전형성’ 사이에 괴리를 느끼던 중, 저 한줄평을 보고나서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또는, 저 코멘트 하나가 내 의문을 압축시켜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건가? 도대체 뭘까? 익숙한 가부장의 모습, 그저 주인공의 성별이 바뀌었을 뿐, 머리로 파악된 그 익숙한 구조, 그런데 정작 느낀 감상은… 호감이라니? 페미니즘 비평을 단순하게 대입시키면 이건 그닥 후하게 쳐줄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감상은, 호감이다. 허허 것참, 도대체 뭐지…?
이를 계기로 생각 끝에 번뜩 답을 내렸다. “가부장 사회로 말미암아 성립된 서사 플롯이라 하여도, 여성주체가 플롯의 중심 인물로 ‘개연성’을 마련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페미니즘 비평으로 접근하고 말고 이전에 설득력 있는 여성주체가 완성된다. 즉, 관객/독자를 설득시키는 여성주체 서사가 탄생한다.”
<당갈>은 ‘아버지를 계승하는 아들’ 서사 플롯에서 아들이라는 요소를 딸이라는 요소로 대체했다. 그러나 성별의 전환이 설득력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는 인도라는 사회 현실과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그러자 놀랍게도, 설득력이 탄생했다. ‘부모를 계승’한다는 서사의 핵심은 온전히 취하되, 그 ‘계승의 이유와 계기’가 납득할만한 정황과 함께한 덕에, 아미르 칸이 맡은 아버지 캐릭터와 레슬러로 성장하는 두 딸의 모습은 이데올로기와 비평 담론을 떠나 관객들에게 정서적으로 납득되었다.
이렇게 의문이 풀리고 난 뒤, 여성주체 서사가 얼마나 다양해질지, 앞으로 날이 갈수록 기대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당 서사 플롯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발생한 것이라 하여도, 흔히들 상남자 냄새 풀풀 나는 아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장르라 하여도, 주인공을 여성주체로 세우되 설득력 있는 정황이 구축된다면, 식상한 패턴의 이야기라하여도 다양한 종류의 여성주체 서사로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울 테니까.
관건은 설득력의 구축이다. 미소지니 허물기나 가부장제 해체 등 관념화 된 지식 담론이 아니라, 말그대로 스토리 내부에서 정서적 납득이 가능한 설득력을 정황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뜻이다. 뻔한 이야기에 주인공의 성별을 여성으로 내놓는다고 해서 지지를 받는 게 아니다. (그랬다가 망한 한국영화가 있는 걸로 아는데 보지는 않아서 자세히는 말하지 않으련다.) 지식 담론으로 논거를 구축할 경우 정치적 올바름은 이룰 수 있으나 이지적 인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목적성이 앞선 나머지 작품 자체의 내적 매력을 소홀히 하기 쉽다.
여성주체의 변용은 무궁무진하다. 역사상 여성주체가 전면에 선 이야기가 드물었으므로. 그리고 무궁무진한 변용의 단추는 서사 내부의 설득력 구축이다.
fin. 디저트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초반부에 무협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 정작 리뷰 대상인 <고양이 꼬리>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고양이 꼬리>를 언급하기 전에, 앞서 말한 바를 정리해보겠다.
여성주체 서사는 가면 갈수록 다채롭고 풍성해질 것이다. 남성주체가 등장하는 익숙한 서사 플롯이라 해도, 그 주체를 여성으로 치환한 다음 서사 내부에 설득력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할 경우, 익숙했던 이야기가 전혀 새로운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다양한 여성주체 서사의 탄생을 낙관할 수 있다. 이는 ‘아저씨들 쩐내 풀풀 나는 장르’라고 생각하기 쉬운 ‘무협’ 서사도 마찬가지. ‘복수와 보은’이라는 협의 논리를 설득력 있게 구축하기만 한다면, 그 주인공이 여성주체로 성립하여도 이야기는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며, 어색하긴커녕 익숙한 ‘복수와 보은’ 플롯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작품을 대하는 양 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고양이 꼬리>는 ‘협(俠)의 논리’를 성취한 여성주체 서사이다. 리뷰 내내 작품의 내용을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음은, 백문이불여일견, 바로 직접 읽으심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협의 논리를 획득한 여성주체, <고양이 꼬리>로 확인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