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한 번쯤은 상황극에 빠져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유별나게 혼잣말 하기를 좋아했다. 초등학생 당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한 모험 길이었다. 횡단보도의 흰색만 밟는 것 같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닥은 순식간에 용암이 흐르고, 빠르게 흐르는 물살 사이로 상어의 무시무시한 이가 반짝이는. 지금 생각하면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이 상상에 힘을 실어주는 건 가로수였다.
집으로 가는 길엔 유난히도 가로수가 많았다. 단풍나무나 은행나무처럼 내가 알고 있는 품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가로수들은 내가 묻는 말에 따라 나뭇잎을 흔들어 보였다. ‘여기부터는 물의 나라야. 그렇지, 나무야?’라고 혼잣말을 시작하면 거짓말처럼 나뭇잎은 흔들렸다. 마치 손짓을 하는 것처럼. 지금 생각하면 이보다 바보 같을 수 없지만, 나는 꽤 오래 ‘나무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 역할에 푹 빠져 있었다.
이 플랫폼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내 상상력의 한계와 마주할 때가 있다. 모든 사람이 겪은 삶의 내용은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나, 스토리 자체의 설득력이 떨어지면 집중하기 어렵다. 그러나 <펭귄은 날 수 없지만 괜찮아>는 조금 특별하다. 어린 시절 내가 푹 빠져있던 상황과 그 상황을 믿지 않는 현재의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이야기에 순식간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귀여운―아, 실은 너무도 용맹스럽지만― IPU의 펭귄을 마주한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거짓말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작품 속 주인공처럼 소설의 이야기를 바꿀 것인가. 작품 속 이야기를 가볍게 받아들일 독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조금 다르다. ‘과거의 나‘를 받아들이는 순간 펼쳐지는 동화 같은 해피 엔딩을 잊고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게 됐다. 부끄러운 과거일 수 있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리뷰에 내 ‘흑역사‘를 남기는 것은 ‘IPU가 내게도 행복한 미래를 선물해주지 않을까?’라는 역할극에 다시 빠져보기 위해서다.
‘맛있는 해산물을 냉장고에 잔뜩 넣어둘 테니 언제든 찾아와도 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