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신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예나 씨는 소설이 써지지 않아 (작가: 그린레보, 작품정보)
리뷰어: 파란펜, 19년 1월, 조회 94

저는 소설을 좋아하지만 소설을 읽는 사람을 볼 때마다 놀라곤 합니다. 아니 이런 시대에 책을, 그것도 소설을 읽다니?

제가 재밌게 읽었던 인문학 책을 쓴 어떤 작가는 한 치의 부끄럼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소설은 거의 읽지 않습니다. 비소설만 읽죠.”

대학에 다니던 시절엔 소설책을 들고 다니는 학생이 동기 전체를 통틀어 저밖에 없었고, 심지어 이런 질문도 자주 듣곤 했습니다.

“도대체 소설을 왜 읽어?”

제 주변엔 소설을 십 년에 한 권 읽을까 말까 한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이렇듯 제가 살아온 세상 속에서 소설은 늘 핍박 받는 대상이었지만, 저는 언제나 소설에 끌렸습니다. 소설 속에 제가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았죠. 제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 훨씬 더 매혹적인 세계를 만날 때도 있었지만, 끔찍한 세계를 맞닥뜨릴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보면 두 세계 모두 이 세계에 발을 붙이고 있더군요.

 

<예나 씨는 소설이 써지지 않아>의 주인공 하예나는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잘못 말했네요. 평범한 듯 보이지만 실은 평범하지 않은 회사원입니다. 방 안 가득 소설책을 쌓아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것도 남몰래 공모전에 몇 번 내보고 포기하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전업작가라는 크나큰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회사까지 그만두고 몰두하고 싶을 정도로요. 결국 회사의 배려로 재택근무를 하게 된 예나 씨는 마음먹은 대로 소설이 써지지 않아 좌절합니다. 그때 예나 씨 앞에 ‘소설의 신’이 나타납니다.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소설의 신이라니! 그런 존재가 있다면 당연히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저 대신 예나 씨가 발 빠르게 소설의 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도대체 소설의 신은 그녀에게(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주었을까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쓴 소설을 읽고 기함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ㅡ이런 쓰레기 같은 글을 내가 썼다니 믿기지가 않아!ㅡ 예나 씨에게 몰입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소설을 쓰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일기장을 보듯 읽어 내려갈 수밖에 없는 글이었습니다. 그만큼 공감도가 높은 작품이었죠.

 

예나 씨는 소설의 신에게서 부여 받은 재능을 발휘해 신 나게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각종 공모전에 이 작품들을 모조리 투고하지요. 저는 예나 씨가 당선되기를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언제나 고군분투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녀가 진정한 동지처럼 느껴졌기에 동지를 잃고 싶지 않았죠.

 

언젠가 서점에 들렀다가 <악평>이라는 책을 발견한 뒤 주저 없이 구매한 적이 있습니다. 부제는 ‘퇴짜 받은 명저들’입니다. 지금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누구나 아는 걸작이지만, 초기엔 얼마나 심한 악평에 시달렸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몇몇 사례만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자연에 대한 현대의 감상주의 태반을 질병의 지표로 간주한다. 그것은 전반적인 간질환의 또 다른 증상이다.

 

<월든>이 출간되었을 당시의 평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생생한 작품이 아니라면 오래도록 살아남지 못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책은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칠 것이다.

 

하루키가 이 책을 세 번 읽은 사람은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죠.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되었을 당시의 평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진정 가치 있는 작품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인정받길 바라는 마음만으로 글을 쓸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아마도 대다수의 작가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예나 씨 또한 소설을 쓰는 진정한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에 저는 격하게 공감하는 바이고요.

앨리스 먼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야기에는 이야기를 실패하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야기는 실패할 수 있지만 이야기를 쓰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믿음은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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