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리뷰를 써 봅니다. 이 글은 특정 작품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문학적 위치와는 조금 다르게, 미국 근대 문학에서 그를 빼 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엘런 포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를 논하려면 최소한 그가 쌓은 소설과 시(저 유명한 에나벨리를 비롯하여), 비평, SF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위를 섭렵해야겠지만, 소설에 한정 지어서만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인완’ 작가님의 글 중에서 ‘악업’ (아마 제 기억으로 이 글의 첫 제목은 ‘내 사랑 스칸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작가님이 자신의 작품을 재편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내적 갈등 혹은 고민을 거쳐 제목을 변경하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만)을 처음 접했습니다.
작품은 어떤 남자가, 어느 날 아리따운 여자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그 스스로에게 빠져드는 기괴한 나르시즘과 인과적 양상에 대한 인간 본성의 그림자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 리뷰를 쓰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처음 인완 작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그 글매와 행간 사이에서 느껴지는 흡입력에 놀랐고,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이야기라도 자신만의 문체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작가라는 점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처음 언급했듯이 마치 포가 좀더 현대적인 느낌으로 썼다면 이런 느낌일까하는 놀라움에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불교나 토속적 신앙 혹은 우화까지도 아우르는 광범위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초기작에서는 포나 크래프트의 문체를 부러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작가의 역량은 한정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인완’ 작가님의 글들을 읽어 본 분들이라면 잘 알수 있을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문체나 심상의 변화와는 별개로 작가님의 글쓰기 주제는 단편적인 느낌과 흥미에 머무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전이 빛을 발하는 글이나, 이야기의 전개가 비교적 쉽게 이어지는 작품에서도 늘 사람의 본성에 대한 성찰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글쓰기가 가능한 이유를요. 상황과 심리묘사, 그리고 작품에서 드러나는 작중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필체의 대담함과 관찰력이 그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엄청난 독서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쌓아 온 내공이 있다는 것도 함께요.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인완’ 작가의 글은 ‘지극히 높은 고지의 심상여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나 간 글들을 읽어보며 한 작가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를 내려 보았습니다.
[두서없이 적는 글이다보니, 이 글이 작가님께 혹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