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이 겨울이라는 건 어찌 보면 다행인 것도 같습니다. 봄이나 여름이었다면 난감하게도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니까요. 모름지기 12월이라면,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달고 차가운 귤을 까먹으며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을 읽는 쏠쏠한 재미를 만끽해야지요.
덧붙여 그 소설이 ‘호러’인 데다, ‘눈 내리는 밤’이 배경이고,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나 분명히 그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상공어’를 그리고 있다면, 이보다 더 탁월한 선택은 없을 듯도 합니다.
<기괴하고 이상한 이야기7. -상공어>엔 젊은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폭설이 내리던 날 밤, 준서는 남편 정욱을 기다리며 라디오를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라디오 디제이가 상공어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강한 눈보라에 섞여서 나타날 상공어에 대비하라는 말이었지요. 이상한 점은 이미 고인이 된 디제이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 일인데 심지어 상공어가 한국에 상륙했다니요.
이름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 상공어는 눈보라를 타고 나타나는 거대한 물고기입니다. 그러나 동화 속에서 등장할 법한 모양새는 아닙니다. 단단한 회색 비늘에 뒤덮인 몸뚱이는 칼날도 들어가지 않고, 무엇보다 몸집이 엄청나게 큰 데다 식성이 매우 독특(?)하고 먹성 역시 무서울 정도로 좋아서 인간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한 존재이지요.
아내인 준서는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난방 텐트를 설치하고 자다가 상공어와 맞닥뜨립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공포 및 호러 장르에서 괴물(귀신)이 등장하는 장면은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이때 작가는 몇 가지 기법을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경우엔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주인공이 어딘가를 골똘히 응시하거나,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거나, 떨리는 손을 내밀어 의심스러운 무언가를 들춰보거나 하지요. 독자는 등장인물이 ‘그곳’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못내 불편하면서도 좀 더 파헤쳐 주길 갈구합니다. 내내 상상만 하던 ‘그것’이 ‘그곳’에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요. 그러나 이 경우엔 원하는 것이 나타나더라도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이기 때문에 만족감에 비한다면 놀라움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상하지 못한 장면에서 괴물(귀신)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예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좀 더 발전된 기법은 이렇습니다. 독자가 눈치 챈 그 지점에서 한 발 뒤에 괴물(귀신)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더 발전된 기법은 이렇습니다. 독자가 눈치 챈 그 지점에서 한 발 뒤에 괴물(귀신)이 등장하지 않아 독자는 실망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두 발 뒤에 등장할 것이라 예상하지요. 그러나 두 발 뒤에 등장한 괴물(귀신)의 모습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독자는 세 발 뒤엔 그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 예상하며 호흡을 고르지요. 그 괴물(귀신)의 정체를 반드시 밝혀내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다는 생각에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책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리고 스티븐 킹이 무릎을 칠 만한 명작 속에선 괴물(귀신)은 결코 전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다 끝나도요. 독자인 저는 ‘당했다!’는 감정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질을 내며 책을 덮고, 이를 닦고,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눕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물 갈치마냥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데, 이상하게도 잠자리가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마음속에서 까끌거리는 뭔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지요.
이럴 리가 없는데.
이야기는 이미 끝났고, 주인공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저는 그제야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본 적도 없는 괴물이, 귀신이, 저와 베개를 나누어 베고 옆자리에 누워 있는 것만 같은 찝찝함을요. 작가를 욕하며 두 번 다시 무서운 이야기는 읽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이만한 금단 증세가 담배 말고 또 있을런지요. 삶이 무료하게 느껴지고, 작은 일에도 지치고, 그렇다고 큰일에도 놀라지 않는 맹맹한 상태가 되면 제 손은 또다시 슬그머니 공포(호러) 소설로 향하고 맙니다.
<기괴하고 이상한 이야기7. -상공어>에서 주인공이 상공어를 가까이서 맞닥뜨렸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히 이 지점에서 출현할 것이라는 예감이야 있었지만 설마, 이런 방식, 이런 모양새일 줄은 전혀 몰랐죠. 일상적이고 친근한 물건 속에서 공포로 향하는 관문을 찾아내는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기묘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명장면이었습니다.
기발한 소재를 다루는 작품의 경우엔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하게 흐를 때도 종종 있기에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절차를 밟아가진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능수능란하게 상공어를 다룹니다. 대바로 대가리를 깔끔히 분리해내고, 사시미로 살만 말끔히 도려내는 일식집요리사처럼, 상공어라는 거대한 물고기를 다루는 작가의 칼(펜)솜씨는 매우 뛰어납니다.
한파가 예고된 겨울 밤, 이불 속에 들어가 차갑고 단 귤을 까먹으며 읽은
겨울 맞춤 판타지 호러 소설 <기괴하고 이상한 이야기7. -상공어>는 매번 눈보라가 치는 겨울밤마다 떠오르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