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거’의 뜻을 아시나요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의심 : 희망 5단지 투신 사건 (작가: 김박, 작품정보)
리뷰어: 파란펜, 18년 11월, 조회 1399

얼마 전 기사를 통해 ‘빌거’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뜻을 알고 나서도 믿기지가 않았던 단어입니다. 빌거는 ‘빌라에 사는 거지’의 줄임말이며, 아이들 사이에서 장난처럼 쓰이고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아파트에 살지 않으면 거지인 줄 안다는 것이죠. 저에겐 매우 충격적인 기사였습니다. 과거에 빌라에 살아본 적도 있었고, 앞으로도 빌라로 이사할 계획이 있기에 철없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하는 말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만일 저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그 아이는 빌거라고 놀림을 받았을지도 모르니까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결혼한 친구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다는 말에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는데, 친구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차피 임대아파트라서 그리 축하받을 일은 아니라고요. 저는 보증금도 낮고 월세도 싼 데다 장기간 임대할 수 있는 조건의 새 아파트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곧 태어날 아이를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데 그 우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빌거’에 이어 ‘휴거’라는 말이 등장했으니까요.

<의심 : 희망 5단지 투신 사건>은 영구임대아파트가 사건의 공간적 배경입니다.

11층에 홀로 사는 노인 서말심 씨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추락이 사망의 원인인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영구임대아파트 희망 5단지의 거주자들은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입니다. 때문에 단지 안에는 사회복지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들은 경로식당을 열고, 도시락을 배달하고, 한글교실을 여는가 하면 공무원과 협력해 독거노인의 삶을 돌봅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은 중년의 형사, 이호찬 경위입니다.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형사나 탐정은 대부분 자신만의 고유한 수사 철학을 갖기 마련이지요.

예를 들어, 미식가 명탐정 네로 울프는 확증에 집착합니다. 확증을 확보하기만 하면 알리바이를 격파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베이커리가게를 운영하는 명탐정 한나 스웬슨은 <딸기쇼트케이트 살인사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사는 삭제의 과정이야.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해 본 다음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거지.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의심 : 희망 5단지 투신 사건> 이호찬 경위의 수사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몹시 의심스러운 놈이 있다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즉, 그는 직관에 의존하는 촉이 매우 뛰어난 형사였던 것이지요.

이호찬 경위가 의심하는 인물은 매우 의외의 인물입니다.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죠. 설상가상으로 서말심 씨에게는 적수가 많았습니다.

이웃 노인인 조갑배 씨와는 다툼 끝에 몸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습니다.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꾸려가는 두 노인에게 영역 다툼은 생존 싸움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조갑배 씨와의 트러블을 해결해 준 사람은 서말심 씨의 아들입니다. 그는 폭력조직의 행동대장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친아들은 아닙니다. 기초생활수급권을 두고 부양의무자문제가 발생하자 그도 용의자 리스트에 오르게 됩니다. 서말심 씨를 담당했던 동사무소 공무원도 그녀와 오랜 기간 불화를 겪었습니다. 역시 기초생활수급권을 두고 발생한 문제였죠. 여기엔 이웃의 시기심도 작동했습니다. 말하자면, 서말심 씨를 둘러싸고 있던 문제 가운데 기초생활수급권이 팔 할을 차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소설의 가장 뛰어난 점은 기초생활수급자인 독거노인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주요 실마리로 배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가끔 독거노인의 삶을 다룬 기사나 시사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장점을 꼽자면, 사건의 배치가 절묘하며 장면 전환이 빨라서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면의 전환이 빠르더라도 전체 스토리의 전개는 매우 늘어지는 작품도 있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전개를 이끌어 나갑니다. 결정적인 카드를 숨겨 놓고 독자와 두뇌 싸움을 벌이는 방식이 아니라, 우직하게 촉을 믿고 나아가는 형사의 발걸음에 소설의 운명을 걸고 있는 진솔함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저는 ‘빌거’나 ‘휴거’라는 말을 무시하면서 살 생각입니다. 빌라에 살든 임대아파트에 살든 나만 떳떳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요. 누군가는 ‘정신 승리’의 자세로 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거의 형태로 빈부를 가르고, 계급적 의식을 가지려는 사람들을 제가 존중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말버릇이야 어른들의 행동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테고요.

<의심 : 희망5단지 투신 사건>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특정한 주거 형태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그곳에 거주하는 노인들의 생활고와 인간의 이기심, 타인에 대한 몰이해가 어우러졌을 때 어떤 파국적인 그림이 그려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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