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이 소설은 짱 쎈 기사단장이 더 쎈 영웅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편지로 시작합니다.
저는 솔직히 편지로 시작하는 소설은 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로 편지라 함은 편지라 쓰고 TMI라고 읽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러나 마녀강림의 경우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서 술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일단 기본 베이스가 모두가 잘 아는 ‘납치된 공주’의 이야기라는 게 빛을 발합니다. 사람들은 빠르게 그 소설의 전체 내용을 떠올릴 수 있거든요.
마녀가 공주를 납치했다? 누군가 구하러 가겠죠. 그게 왕자건 동생 공주건요. 그럼 가시덤불이나 가시덤불 흉내를 내는 몹들이 나올 거구요. 공주가 나오니까 공주가 나올 법한 세계일 테죠. 바로 돌이 깔린 도시와 성채, 마법사와 용, 전설이 된 영웅과 몬스터 등을 상상할 수 있지 않나요? 어쩌면 “공주를 구해오는 자에게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겠네!”라고 외치는 국왕이 있을지도 모르죠.
중요한 건 이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럽게, 한 큐에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현대 사회의 독자들은 의외로 새 이야기, 너무 신선한, 너무 창의적인 이야기에는 많은 피로를 느낍니다. 오히려 기존에 많이 접해보았기 때문에 더 친근함을 느끼고, 내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세계를 새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담감을 덜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후 이어지는 마녀의 행적, 왕국의 파병 등을 아주 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기서 이 소설은 뒤통수를 칩니다. 네? 왕자가 공주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구요?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구요? (생각해보니 소개글이 수정되었네요. 제가 읽을 적만 해도 공주가 납치되었다, 까지밖에 없어서 통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공주를 구하러 가는 기사단장의 이야기를 할 것처럼 해놓고, 이 소설은 그 기사단장을 죽이려고 하는 암살자의 이야기를 풉니다. 이 즐거운 뒤통수를 따라가 봅니다.
주변 사람들이 여럿 등장하고, 그 중심에는 제레미라는 이름의 미남(중요합니다)이 운영하는 펍이 있습니다. 이 미남은 상당한 실력자인 것 같고 미남이지만 허세 따위 부리지 않습니다. 보통 판타지 소설의 남자주인공들이 얼마나 멋있는 척을 해대는지 아신다면, 그것에 질리셨다면 제레미는 정말 훌륭한 구원책입니다. 이 제레미가 얼마나 멋있냐구요.
“저… 영업 끝났나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제레미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손님을 보았다.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뭐랄까… 비록 헤어진 애인이지만 종종 보는 마법사 루다 브리스틴이 제레미 자신이 지금껏 본 가장 아름다운 여성 1위였는데, 방금 그녀가 2위로 내려간 것 같은 첫인상이었다.
“네. 아쉽지만 오늘은 영업이 끝났습니다. 손님.”
말하고 생각이 다른 제레미~!~!~!~!~! 얼마나 귀엽고 담백하고 야물딱진가요, 우리 제레미…
이후에도 제레미의 멋짐은 계속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개를 따라가지 않는 몇 번의 통수가 있는데 소설을 읽는 분들의 재미를 빼앗을 순 없으니 굳이 나열하진 않겠습니다.
“아니 얘는 대체 왜 이 타이밍에 이 말을 해!” “아니 이 루트면 당연히 이런 방향 아니었어?”싶은 걸 너무 손쉽게 틀어버리니까 이제 스스로의 독자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내가 쉬운 사람인가, 이 작가님이 통수를 잘 치는 건가 고민하면서요.
저는 지금 이 리뷰가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그냥 하이판타지 좋아하면 일단 읽어보라고 멱살 붙잡고 흔들고 싶을 마음인데 간신히 누르고 있어요… 제발 읽어주세요… 우리 제레미 좀 봐주세요… 제발 우리 귀염뽀짝 리소 좀 봐주세요……..
리뷰 쓰려고 정주행을 하다 보니 자꾸 덕심이 차올라서 이 소설의 멋진 점을 좀 더 나열하겠습니다.
일단 남자주인공은 잘생겼습니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멋있습니다. 이 멋짐이 허세로운 멋짐, 중2스러운 멋짐, 정말 누굴 넣어놔도 멋있을 상황에서의 소년만화 같은 멋짐이 아니라 어른스러운 멋짐이라는 점이 엄청난 매력 포인트입니다. 지옥불 속에서 여자주인공을 구해내지 않아도 멋있을 수 있습니다. 대사 하나하나마다 센스가 느껴지고요, 관록이 느껴집니다. 작가님이 연애를 많이 해보신 걸까요? 이 소설을 읽을 남자 분들이 계시다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자는 이렇게 꼬시는 겁니다. 제레미가 현실에 나타난다면 저는 이미 제레미의 노예, 포로……
종종 등장하는 묘사도 아주 야무집니다. 고전적이지만 세련된 유머는 작가님이 언어유희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걸 알게 해줍니다.
‘제레미는 그의 비교급 선정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실존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칼에 미친 드래곤의 목을 잘랐다는 전설 속 여자와 지금은 주점에서 손님이 너무 없어 컵 닦는 일이 주 업무가 되어버린 남자를 비교 하는 건…’
‘조심스레 추측해보건대 아무래도 이 손님은 미친 것 같다.’
‘제레미는 이제 막 새 삶을 살아가기로 한 전설의 영웅께 부유하지 않는 자가 살아갈 세상의 잔혹함을 알려주기로 했다. 더불어 이 주점에서 외상은 절대 안 된다는 사실도.’
사실 마녀강림은 사실 서술부가 짧은 편은 아닌데요, 이상하게도 전혀 서술부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일단 인물에 대한 행동묘사와 심리묘사가 고루 배치되어 있어서, 행동에 대한 정보가 있으니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고, 심리에 대한 묘사도 모자라지 않아서 인물의 생각이 잘 전달됩니다.
대부분의 묘사가 간결하며, 필요한 부분은 상세한 묘사가 들어가서 어느 부분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지 바로 와 닿습니다. 대체로 깔끔한 필체라서 약간의 장식적 표현만으로도 독자는 시선을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야기는 잔잔하지만 항상 텐션을 유지한 채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채로 진행이 됩니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나라의 공주님이 납치된 상태이니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네요.
그렇다고 무거우냐? 그건 아닙니다. 너무 서술만 가득해서 지루함을 주지도 않고, 필요할 때마다 나오는 유머는 분위기를 가볍게 리프레쉬하고, 늘 모든 일을 담백하게 받아들일 것 같은 남자주인공 제레미의 태도가 자못 칙칙할 수 있었던 중세 판타지 분위기를 멋들어지게 해소합니다.
작가님이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시니 그 부분을 좀 이야기 해볼까요.
이 소설을 전체 관통하는 이야기는 공주에게 납치된 마녀입니다. 그럼 초반에는 마녀의 무시무시함을 널리 알려서 세상을 이롭게 하고, 마녀가 왜 부활했는지, 공주는 왜 납치했는지 궁금증을 던져줘야 합니다. 그리고 점차 마녀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이미지가 남아야 합니다. 전쟁이 진행되고 하는 것들이요.
제레미를 봅니다. 적국의 암살자가 공주를 구하려고 하는 왕국의 기사단장을 죽이라는 지령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럼 결 부분에서 당연히 기사단장을 죽이거나 마주치겠구나 싶습니다. 기와 결이 정해졌으니 승, 전이 중요해집니다. 기사단장은 당연히 마녀와 싸우고 있는 전쟁 지역에 있을 테니, 주인공은 반드시 기사단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이 이동을 얼마나 개연성 있게, 지루하지 않게, 그것도 전쟁씬까지 넣어서 짜느냐가 핵심이라고 봅니다.
판타지로맨스니까 전체를 관통하는 로맨스 들어가야 합니다. 제레미와 리소의 관계성이 생겨나야 하죠. 제레미는 기억을 잃은 리소에게 새 리소 셀가브로의 시작을 열어준 사람입니다. 시작 충분하죠?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요? 관계가 깊어져야 하는데, 때마침 제레미가 기사단장을 죽이러 가네요? 이별은 때때로 감정을 더 깊어지게 합니다. 기억을 잃은 리소로서는 그녀에게 새 시작을 만들어준 제레미를 그대로 놔둘 수 없습니다. 따라갑니다. 당연히 관계성은 알아서 더 진해집니다. 물론 아직 ‘기’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게 최소한의 기승전결 요소입니다. 빼봅니다. 그럼 뭐가 남나요? 카일리네 그룹, 차렌 부대, 바움, 나로겔, 루다 브리스틴, 페르미, 티드메가 남네요. 티드메는 리소와 붙어 행동하고 있으므로 넘어갑니다. 미래에 활약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로겔? 아무래도 얘는 리소와 세릭 등 정치적 인물이 나왔을 때 활용될 것 같습니다. 여자주인공 리소에게 지속적으로 외부의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이므로 일정 지분을 받을 합당한 자격이 있습니다. 얘는 뭔가 사건을 일으켜도 일으킬 것 같다는 암시를 충분히 주었습니다.
카일리네? 역시 다음 부에서 활용될 것 같습니다. 아직 합류하지 않았으나 합류할 것 같은 모양새를 했으므로 이 녀석들의 무대는 아직 여기가 아니겠죠.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지분. 딱 좋습니다.
차렌, 바움, 루다가 남습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제레미가 무등급 병사가 되어 도시를 떠나고, 바움을 만나고, 차렌이 전쟁을 준비하고, 그 전쟁의 끝에서 세릭을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 1부의 상당한 양을 떼어 받습니다. 1부의 주제가 마녀전쟁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루다는 거의 주인공 급의 지분을 받죠. 제레미보다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저의 착각일까요? 루다는 페르미와 함께 소설의 많은 페이지를 얻어냈고, 마녀의 무시무시함과 강력함을 알렸습니다. 중간에 페르미와 함께 기->승으로 다이렉트 직진을 하면서 떡밥이 와장창 풀립니다. 차렌 부대의 물리적인 전쟁이 아직 ‘기’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매우 빠른 속도입니다. 얘네는 세릭이 오고 나서야 겨우 승으로 넘어갈까 말까 하고 있거든요. 개인적 기준에서, 지금 가장 전개 속도가 빠른 부분은 이 루다와 샤르나티의 관계성 같습니다.
차렌과 바움은… 어디에 쓰이게 될까요? 사실 이게 제 가장 큰 미스테리입니다…
상당히 멋지게, 많이 나온 차렌을 전체 줄거리에서 생각해보자면, 마녀 군대의 무서움을 알렸구요, 나로겔의 쓰레기같음도 알렸죠. 그리고 제레미의 잘생김도 알렸습니다. 차렌은 지속적으로 제레미와 세릭의 관계성을 만드는 데에 활약해주지 않을까 하고 있습니다. 암살자의 이야기 말이죠. 관계성을 위한 보조로 출연하기엔 지분이 상당했으므로 마녀와의 전쟁에서 뭔가를 더 하지 않으려나 하고 있습니다.
바움은 르찰디 베르망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기승전결에 따르면 르찰디 베르망은 반드시 나와야하고, 바움의 이야기도 어디에선가 반드시 끝을 맺게 되겠죠. 안톤 체호프 가라사대 “1막에 권총을 소개했다면 3막에서는 쏴야 한다. 안 쏠 거면 없애버려라.”라고 하니까요.
결론이 뭐냐구요? 그냥 재밌다는 겁니다. 저는 좋아하는 소설을 분석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냥 작가님이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원하셔서 생각만 해봤습니다.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같은 것들을요. 제 생각은 정말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 작가님은 부디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소설의 멋진 점을 이야기하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소설에서는 여자 캐릭터들이 독립적으로 움직입니다……
보통 판타지 소설에서 주인공이 남자일 때 여자 캐릭터들이 그 남자주인공의 장신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마녀강림의 경우… 드래곤 모가지를 단칼에 따는 전설적 영웅, 부대를 책임지는 카리스마 있는 사령관(언니라고 부르고 싶어요), 어딘가의 술주정뱅이 겸 불세출의 대마법사, 남들의 두려움을 사는 마녀…… 듣기만 해도 다 있어 보이는, 한 가닥 하는, 원래 대부분 남자 캐릭터들이 가져갔던 직업에 힘세고 강한 여성 동지 분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제가 이런 리뷰를 썼다고 너무 ‘여캐를 넣어야 돼! 여혐에 주의해야 돼!’같은 식으로 신경 쓰진 않으시기만을 바랍니다.
저는 작가님의 소설이 지금 이대로도 온전히 좋고, 작가님의 세계관이 좋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개그 코드도 너무 좋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작가님의 글이 좋은 거니까요.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도 될 정도로 충분히 멋진 글입니다.
제가 그냥 혼자 뻐렁쳐서 “제발 누가 좀 이 멋진 글을 보구 나랑 같이 덕질해줘…!”의 느낌으로 쓴 리뷰니까 작가님은 이 독자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정말 10년도 기다릴 수 있으니 부디 완결만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온전히 작가님의 글 자체가 좋은 거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원하실 때, 내키는 방식으로 오셔서, 같이 즐길 수 있게만 해주세요.
여러분 제발 같이 우리 멋진 제레미 리소 세릭 덕질해요…… 제발 ㅈ발 그냥 봐주세여 흐아앙 넘모재밋자너 제발 제레미 내꺼하자 진짜 제레미 내남자………….. 운차이 이후로 이렇게 나를 뻐렁치게 만든 남주가 없었는데…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