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 작가는 작법서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151P에 “이도 저도 안 될 땐 고양이 이야기를 써라”라고 적어놨습니다. 언젠가 이산화 작가가 자기 작법서를 낸다면 ‘고양이’ 대신 ‘폭발’이라 적지 않을까요? ‘이렇게 세상은 끝난다’는 그런 단편입니다. 터져서 시작하고, 터지면서 끝나요.
이 세상엔 많은 부조리가 있지만, 현실은 일각의 적폐마저 청산하기 힘들죠. 창작물이라고 다를까요? 쓰면 된다지만, 써본 사람들은 압니다. 그냥 적을 땐 쉽다가도 ‘말이 되게’ 만들긴 오질나게 힘들거든요. 사람은 많고 이야기를 평가할 잣대도 제각각이라 하나의 이야기를 다수가 끝까지 읽어주기엔, 나아가 다수에게 공감을 얻으려면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에요. 창작물에서나마 “힘들어? 가슴 만질래?”처럼 단순명쾌하면 좋을 텐데 말이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어려운 걸 이산화 작가가 해냅니다! 사회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학교를 무대로 각종 현실적인 부조리를 진열한 다음 한 큐에 날려버리는 카타르시스까지. 그 와중에 지루하지 말라고 매력적인 캐릭터의 1인칭 서술을 읽기 쉽게 풀어냅니다. 단편은 이렇게 쓰라는 본보기와 같아요. 장편보다 단편이 좋은 분, 캐릭터의 개성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딱 20분만 투자해도 손해 보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리뷰에 스포일러 적지 말라는 분 있으실 것 같아 적자면, 폭발은 스포일러의 축에 끼지도 못합니다. 이 작품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자아를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이하 ‘오펜하이머’)에 위탁한 건방지면서도 귀여운 고3의 행적에 있거든요. 딱 내 주위에만 없으면 완벽한 그런 캐릭터입니다. 어찌나 캐릭터가 매력 덩어리인지, 작중 캐릭터의 편린만 드러난 상대역 ‘텔러’에 대해 ‘오펜하이머’와 어울리도록 각종 2차 해석과 창작이 SNS에 쏟아지겠어요? 개인적으론 탐탁지 않지만요. 이산화 작가는 전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를 통해 인간관계에 있어 성별과 외모는 큰 변수가 못 된다고 천명했다 생각하니까요. 작가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ㅎㅎ
그리고 소재나 기승전결을 풀어가는 방식이 맘에 안 들더라도 완독 후 소득이 있단 점에서 이번 작품을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단편에 요구되는 책임 회피가 매우 능숙해요. 단편 좋은 게 뭔가요. 쓰고 싶은 구절만 딱 쓰면 OK거든요. 나쁜 점? 그 앞 뒤 맥락을 어떻게 생략하느냐예요. 맥락이 사라진 단편은 뜬구름으로 끝나기에 십상이거든요. 그럼 안 읽어요. 해봐서 알아요 흑흑.
‘이렇게 세상이 끝난다’의 경우 맥락이 맡아야 할 책임을 현실에 떠넘겼습니다. ‘이게 말이 돼?’ 싶은 건 독자의 학창시절 추억을 거치면서 직간접적으로 납득하게 됩니다. 유사 사례가 존재하는데 누구 뇌피셜로 말도 안 된다 태클을 걸까요? 예나 지금이나 학교 꼬라지가 어디 안 갔다는 증거죠. 슬프게도. 이 현실과의 비교가 어찌나 강력한 명분을 자랑하는지 작중 고3인 화자의 이상하리만큼 상세한 폭발 지식조차 ‘수능 끝난 고3의 잉여력이면 있을 법하지’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예요. 작중 수많은 부조리가 등장하는 와중에 실질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의문이라곤 ‘전교 1등의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학교 위신 때문에 봐준다고? 걔한테 밀린 2, 3등 학부모가 가만히 있을까?’ 뿐이고요.
캐릭터 정립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중 등장인물들이 존경하는 위인에 자아를 의탁했단(정확히는 화자가 그렇게 여기는) 설정 하나로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했을 서술이 대폭 생략됐어요. 그 위인이 누군지 모른다면 몰입도가 떨어지겠으나 꼭 필요한 내용은 본문에도 적혀있어 크게 문제 되지 않고요. 아주 영리한 장치입니다. 미리 해당 위인을 잘 알고 있거나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에서 흥미를 느꼈다면 금상첨화겠죠. 앞서 적었듯이 전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에서도 등장인물 개개인에 대한 외모 묘사가 생략됐는데 이 기법이 한층 발전하셨구나 싶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세상이 끝난다’는 이산화 작가 특유의 생략 기법과 현실을 끌어들인 서사가 승화작용을 일으킨 액기스와 같은 단편입니다. 이런 단편에 흥미가 없다면야 끌리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런 분들을 위해 하나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런 단편, 얼마나 읽어보셨나요?
ps. 예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이너마이트맨’이라는 독립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빵빵 터지는 장면을 기대했는데 중간에 수 십분 고해성사만 이어져서 엄청 지루했거든요. ‘이렇게 세상은 끝난다’가 ‘다이너마이트맨’이란 이름으로 개봉했을 세계선이 있다면 넘어가보고 싶네요. 위엔 저렇게 적었어도 역시 ‘텔러’가 어떨지 궁금하다구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