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게이인 동시에 트랜스젠더 혐오자(트랜스포비아)이다. 이는 극적인 설정처럼 보일 수 있으나 퀴어 당사자인 입장에서 볼 때 ‘나’와 ‘남자친구’ 같은 인물은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우선 밝히고 싶다. 퀴어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만큼 퀴어를 혐오하는 퀴어 또한 어디에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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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남자친구’는 ‘그 애’를 죽인다. 이어서 자신을 괴롭히던 20대 게이들도 죽인다. ‘그 애’는 캐리어의 넣어진 채로 매장되고 환상의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난다. 이는 장르소설의 줄거리로 인식되기 쉬우나 더 큰 분류에서는 엄연한 퀴어소설이다. 단순히 등장인물이 퀴어라서 뿐만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주인공들은동을 퀴어이자 퀴어포비아이다. 이 점은 이 작품의 입체성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이 소설에 ‘퀴어 소설’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이 글을 읽는 퀴어 당사자들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내쉬게 한다. 그들이 보이는 퀴어포빅한 행태가 너무나도 현실적이며 실제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서 작가가 가진 묘사의 힘은 여실히 발휘된다. 단순히 상황과 정경을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그리는 데에서도 말이다. 머리를 마구잡이로 자르는 행동, 야구방망이 끝을 핥게 하는 행동. 이런 사실적인 묘사가 이야기가 가진 이상한 공포감에 무게감을 더한다. 풀어 말하자면 원한을 가진 혼(‘그 애’)의 행동을 독자들이 인정하기 쉽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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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단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자친구’는 ‘그 애’를 죽였다. ‘나’는 방관하고 동조했다. 결과적으로 ‘남자친구’는 또 다른 살인을 이유로 한 형벌을 받고, ‘나’는 끊임없는 고통을 주는 질병과 함께 죽지 못해 이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정도의 벌은 평범한 단죄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영리한 면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평범할 수 있었던 결말을 특별하게 만든다. 바로 동생의 커밍아웃이다. 그녀, 아니 ‘그’가 진짜 트랜스젠더인지 아니면 ‘그 애’의 혼이 빙의한 것인지는-아마 후자일 것으로 보이나-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트랜스포비아 주인공에게 트랜스젠더인 동생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절망감을 느낄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꼴 좋다 내지는 그럼 그렇지 나쁜 짓 하면 안돼, 정도의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배우게 된다. 혐오자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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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애의 책상을 건너다 보았다. 당당히 나는 트랜스젠더다, 여성 화장실을 이용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그 애가 실루엣으로나마 칠판 앞에 서 있었다.’
혐오발언과 폭력, 그리고 포비아들로 뒤덮인 소설 ‘이름 없는 싸움’에서 굉장히 이질적인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문장이다. 우리는 왜 우리가 ‘우리’라는, 세상에서 가장 명확하며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가. 10대의 ‘그 애’가 뱉어낸 저 말 한 마디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린치당할 것을 알면서도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빛나는가. 재미있는 것은 저 부분이 동시에 ‘나’에게는 공포스러운 기억의 소환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이런 역설적인 면들이 이 소설의 특장점이자 이 작품만이 가질 수 있는 장르적 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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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내리자. 이 작품은 굉장히 잘 쓴 퀴어 소설이다. 십대 퀴어들의 연애와 포비아적 학교폭력을 사실적으로 보여준 것, 그들의 범죄의 시작과 끝을 장르소설적 문법으로 그려낸 것, 그리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회적 메세지를 지닌 것. 퀴어 당사자들은 분명 다르게 읽히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을 접한 것이 오늘이 처음이지만 이상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언젠가 더욱 발전한 모습으로 나의 기대치를 초과하는 더 멋진 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좋은 작품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