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 이상적인 연애의 모습은 사랑하는 사람을 적당히 알고, 적당히 오해하며, 적당히 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지 못 할 때, 사랑은 위험해진다.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질되어 버리고 만다. 너무 많이 알면 소유가 되고, 너무 오해하면 증오가 되며, 너무 위하면 이기가 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적당히’가 너무나도 개인적인 측정값이란 것. 모두가 그 다른 측정값을 기준으로 남을 재단하며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 혹은 사랑한다고 믿는 다는 것. 차라리 사랑은 불가능한 감정이라고 말하는 게 옳은지도 모른다. 사랑을 닮은 것들만이 사랑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다. 이 불청객이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소설은 다소 폭력적인 방향으로 드러낸다.
‘나’와 W는 게이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개인의 지향은 특징적으로 작용한다. 특징을 공유하는 ‘나’와 W는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관계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나’에게는 W로서는 알지 못하는 이해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바로 가족의 죽음과 가족의 시체를 유기한 경험이다. 알바를 하던 도중 ‘나’가 받은 W에게서 온 뜻밖의 문자와 문자 이면에 숨겨진 살인이라는 진실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감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에 조금 놀라긴 하지만 이내 다른 것에 집중한다. W 또한 자신과 같은 게이라는 점. 그리고 사랑(이라고 믿을 만한 것). 이후로 볼 수 있는 건 친족살해의 전말이다. 게이라는 것을 들키는 W,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을 포기하거나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W. W는 이내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칼을 빼앗아 들고, 가족을 몰살시킨다. 믿기지 않겠지만 여기에도 사랑을 닮은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 바로 오해이다. 가족들은 W가 (본인들이 생각하기에)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충격요법은 다소 폭력적이지만 필요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믿음은 곧 오해의 동의어이다. 오해는 착실히 증오를 쌓았다. W는 자신에게 겨누어 있는 가족들의 증오를 느꼈고, 그것은 가족을 증오하게 만들었다. 증오의 대상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후에 밀려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W는 ‘나’를 불렀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W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를 경찰에 넘기고 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 ‘나’는 W를 너무 많이 이해해버렸다. W가 행한 일들의 기저에 자리잡은 증오와 차별, 폭력들을 알면서 다시 그것들이 도사리는 비정한 사회로 내몰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W를 더 많이 이해하기로 한다. 그렇기에 죽은 누나가 돌아와 자신을 찔렀다는 W의 이상행동에도 그를 품어 주었을 것이다. 그 순간 ‘나’가 보이는 웃음은 W를 소유했다는 감각에서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렇다. W는 이제 ‘누구도 깰 수 없는 사랑의 연으로 이어진 울타리’ 없이는 삶도 일상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해가 깊어질수록 타인은 차라리 ‘자신’에 가까워진다. 알랭 바디우는 대담집 <사랑 예찬>에서 사랑이 낭만적인 개념,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영웅적 행위와 같은 무언가가 세계에 맞서 나타나면 사랑은 “둘이 등장하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가 등장하는 무대”가 되어버린다고 이야기한다. 비정한 세계에 맞서 W를 보호하는 나의 태도는 어느 정도 영웅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과연 ‘나’는 어느새 W가 느끼는 불안을 함께 느끼고 있다. ‘당신도 위험’하다는 무당의 한 마디는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이윽고 불안은 현실에서 실재로 도래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성에 의해 기름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학교에서는 ‘나’와 W가 게이이며 연애 중이라는 소문이 돈다. ‘나’는 그것들을 해결해보기 위해 소문의 근원지를 찾는다. 그곳에서 만난 건 다름아닌 예전에 죽은 ‘나’의 누나이다. ‘나’는 누나의 제안에 따라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누나의 복수를 한다. 그건 마치 죽은 아버지의 말에 따라 여자를 강간하려 드는 W의 태도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실재하지 않는 것들에 의해 ‘나’와 W가 움직이고, 나아가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질되어 버린 것들)이 사람을 움직이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그 모든 일들이 끝나고 경찰이 찾아온다. ‘나’와 W는 크게 의심받지 않고 간단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것만으로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그 길로 곧장 여행길에 오른다. 전부다 괜찮아질 거라는 암시에 가까운 말을 서로에게 중얼거리며 차를 타고 달린다. 이번엔 ‘나’한테 죽은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지만 이제 와 그건 너무 사소한 일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바깥을 향해 절대적으로 폐쇄된 것이다. 이기의 절정이다. 그들에게 이제 ‘적당한’ 거리라는 건 없다. 스스로에게 거리를 둘 순 없는 법이니까.
사랑에 대한 사유는 언제나 나를 즐겁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을!’이라는 태도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이 불가능한 감정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소통의 불가능성에 기인한다. 인류에게는 도무지 사랑을 전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쓰거나 말하더라도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으로 들리는 공기의 울림이, ‘사랑’이라는 모양의 문자가 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는 오해와 의심을 동반하게 된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착각과 불신이 감정을 좀먹는다. 그럼에도, 그러니까 끊임없이 사랑을 이야기할 수밖에. <한 여름밤의 꿈>에서 보여준 감정들 또한 온전한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하지만 저 감정들과 행위들을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재미있는 점은 사랑을 완벽하게 규정하지 못하기에, 더 많은 것들을 사랑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의 불가능성은 곧 사랑의 가능성이다. ‘나’와 W 앞에서 나는 오늘 또 사랑에 대한 규정을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