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를 보았다. 감상

대상작품: 그녀는 잘 살고 있었다 (작가: 연희, 작품정보)
리뷰어: 글포도, 18년 8월, 조회 55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뫼비우스의 띠가 먼저 떠올랐다. 안과 밖 구분이 없는 것, 어딘가 한쪽에서 시작해도 결국 안과 밖 모두를 거치게 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살다보면 끝이 나지 않는 무한반복이 계속 됨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그 띠를 달리고 있는 건 무엇일까?

 

이 소설의 뫼비우스의 띠는 ‘그녀’와 ‘나’일 수도 있고 그들 각각의 변화일 수도 있다. 그것은 복합적이면서 기묘하게 엇갈리며 계속된다. 그 처음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이다.

 

지금도 ‘잘 살고 있는’ 그녀는 초등학교 때 이미 빛나는 길 위에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부잣집 막내딸. 그녀의 부모들이 돈으로 깔아준 꽃길을 사뿐 사뿐 걸으며 남자 선생님들의 과도한 사랑(?)을 받으며 -이건 그다지 부럽진 않지만- 또한 아이들 모두를 거느릴 수 있었다. 선생님들의 지지와 선물들로 생성된 권력으로 그야말로 여왕처럼 군림하는 그녀. 모든 곳에서 주인공처럼 보이는 예쁜 아이.

반면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는 상대적일 수도 있지만 어두운 길에 서 있는 인물이다. 드러나지 않는 쪽에서 주인공을 부러워하면서도 제 갈길을 가려는 공부 잘하는 아이. 그러나 중학교 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으면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과 비슷해서 분노를 느끼는 아이가 된다. ‘나’는 처음에 아이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르는 폭력들을 목격하는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해선 안 되는 짓이 분명한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어지던 왕따와 부당한 담임선생님의 폭력.  옳지 않음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조직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부조리함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나서 상처 입은 아이.

초등학교 6학년이 겪기엔 너무 끔찍한 그런 상황을 견디고도 어른이 된 ‘나’는 이제 학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자신이 운영하던 학원에 찾아온 민주의 엄마가 ‘그녀’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녀’는 의사와 결혼해서 동부이촌동의 넓은 아파트에서 사는 부잣집 사모님이고 ‘나’는 학원을 운영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대조적인 삶을 살고 심지어 ‘그녀’는 행복해보이기까지 한다. 소설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그녀’를 만날 즈음의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기도 하다.

 

그들이 만나는 그 장면에서조차 ‘그녀’는 드러나지만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모르고 나만 ‘그녀’를 안다.

 

그녀를 본 뒤로 모든 기억이 더욱 또렷하게 떠올랐다. 늘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세월의 힘에 의해 조금씩 희미해졌던 기억들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남자아이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찔렀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나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녀’ 와의 만남이 뫼비우스의 띠에서 안과 밖이 바뀌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나’에게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억나게 했고 ‘그녀’를 만난 이상 ‘나’는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학원 운영도 잘 되고 수강생도 늘어나는 ‘나’가 결정적으로 기뻐하는 순간을 보자. 길에서 핼쑥하고 흰머리도 늘고 구부정한 허리를 한 채 걷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났을 때다.  그런 ‘그녀’를 보자마자 ‘나’의 식욕은 되살아나고  오랜만에 깊은 잠도 자게 되며 푸른 초원을 날아다니는 꿈까지 꾸게 된다.

타인의 불행이 어떻게 이토록 행복감을 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토록 ‘그녀’의 불행을 원하고 있었던 것일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말라서 말기암 환자 같았다던 ‘나’는 이제 살이 찌기 시작한다.

또 다른 고백 속에서 ‘나’가 조금씩 살이 찌기 시작한 건 스물 두살 때부터라고 한다. 담임이 사망한 소식을 들었을 때. 역시 그녀는 타인의 불행 앞에서 위로를 받는 듯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세월동안 ‘그녀’가 남부러워하는 의사 남편과 예쁜 딸과 살고 있을 때 ‘나’ 는 붉은 벽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하나가 추가된다. 부서진 오르골. 그것들은 그녀의 어두운 마음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상징이 아니라도 ‘나’는 소설속에서 직접적으로 ‘그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그녀가 불행하길 원했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지길 원했다.

 

‘나’가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저지르고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등학교 6학년 때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단호하게 ‘싫어’를 외쳤던 그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를 이해할 수도 있고 심정적으로 충분히 공감이 간다는 게 떨떠름할 뿐이다.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없는 인간. 그러기엔 이 세상이 너무 가혹한 곳인 모양이다. 또한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기엔 너무 나약한 존재들인지도. ‘그녀’가 ‘나’ 에게 준 상처는 너무도 끔찍했고 그것은 긴 시간동안 ‘나’의 영혼을 파괴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꼭꼭 눌러왔던 ‘나’의 증오가 비로소 날개를 펼치는 순간이 통쾌하지만은 않은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하긴 샤프로 남학생의 허벅지를 찌를 수 있었던 그 분노가 ‘나’의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천성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가 ‘그녀’에겐 별로 뭘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잠깐 눈감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훌륭한 복수가 가능할 수도 있는 삶이라니. 그것도 참 씁쓸한 일이다.

 

결국 부서진 것, 깨어진 것은 또 다른 날카로움이 돼서 다른 무언가를 찌르게 된다는 것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영원히 돌고 돈다는 것. 때로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저도 모르게 모습을 바꿔가며. 선을 연기하거나 혹은 악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선한 미소로 누군가에겐 칭송받으면서도 타인의 불행을 기뻐할 수 있으며 누군가를 괴롭혔던 사람이라도 또한 누군가에겐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으며. 어제 행복했던 삶이 오늘 우울해질 수도 있고 또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는 것 같은 일이 반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만 볼 수 있는 창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독자인 나는 유감스럽게도 ‘나’가 본 결말이 통쾌했다. 내 안 어딘가에도 붉은 벽돌 하나가 마련 돼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읽고 나면 소름이 돋게 하는 소설이다. 어쩌면 ‘그녀’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나’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아마도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선을 그을 때처럼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구성이 약간 매끄럽지 못하다고 느꼈는데 내용을 다 알고 읽으니 그게 그렇게 거슬리진 않는다. 첫첫번째 느낌이 맞는 건지 두번째 느낌이 맞는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구성 부분은 작가님께 맡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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