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stelo님께 드리는 리뷰입니다. 평소와는 달리 글에 힘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갔습니다. 의뢰를 받고 쓰는 글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혜린의 글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대한 옅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결말부에 대한 옅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주인공이자 탐정인 긴다이치 코스케는 때때로 소설 중반부 즈음에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라지만 이를 밝히지 않는다.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고, 사람이 죽고 다친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범인의 행동을 멈추는 대신 그저 그 자리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지켜볼 뿐이다.
이런 면에서 긴다이치 코스케는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분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독자에게 단서를 하나하나 제공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지적해준 다음, 독자가 내놓은 대답이 옳은지 확인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확실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 후 “사실 저는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이야기 끝에서 말하는 그의 모습은 이야기를 직접 겪어나가는 등장인물이라기에는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해답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소설 전개 방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 탐정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면서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면 이야기는 동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조, 아름답게 짜여진 이미지와 이를 부수는 카타르시스 등 다양한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이는 이야기 밖에 있는 작가나 독자에게만 보이는 것들이다. 이야기 속을 직접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이런 거대한 동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2
세영을 볼 때 나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볼 때의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 속을 살아가는 등장인물이라고 하기에 세영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다. “26회 – 기다릴게”에서 나타나는 세영의 생각을 따라가보도록 하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난 괜찮으니까 계속 말해.”
“아니야.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미안해.”
예은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이기 싫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더 설명 안해도 괜찮아. 힘들었을텐데 자세히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26회-기다릴게
마치 수학문제를 푸는 것처럼 이 대화내용은 매우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까막이 님의 리뷰 ‘감정선을 추리로 미분하면’에서 지적되었던 시점의 혼재 문제로 이어진다. 26회-기다릴게에서 나타나는 세영과 예은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모두 독백으로 바꿔 세영에게 할당한다고 가정해보자. 크게 위화감이 없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영은 자신에게 전달된 대화를 받아쳐 정확히 예은이 있는 위치로 전해준다. 세영과 예은 사이에 오가는 말들을 조금 더 살펴보자.
세영: “혹시 책을 읽다가 이상한 길로 가지 않았어? 그래서 늦은 거고.“
예은: “굳이 말하자면 그렇네… 외곽 쪽으로 가니까 길을 모르겠더라고…”
세영: “ 우리 동네에 10년 넘게 살았는데 말이야.”
예은: “그래!”
세영: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왔고?”
예은: “맞아.”
7회-지각생을 위해서
예은: “이게 분말압축식 소화기거든. 분말이니까 가루란 말이야. 가루가 그냥 두면 뭉치거든. 왜 부침가루 오래 놔두면 뭉치는 것처럼. 그래서 뒤집는 거야.”
세영: 이상한 예시였는데 딱 이해했다. 그냥 세준이랑 부침개를 해먹은 적이 있어서 그렇다.
18회-뒤집힌 소화기
이런 면에서 세영은 예은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작가가 하려고 하는 말을 전해주는 나레이터에 더 가까워 보인다.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단서들은 작가가 정해둔 한 가지 결말로 향할 것이다. 등장인물이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면 이야기는 해결될 수밖에 없다. “26회-기다릴게”의 제목처럼 단서가 충분히 쌓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 소설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최근 업로드된 챕터에 나타나는 모티브를 통해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수색 끝났데. 210일 만에 수색 종료.”
28회-그날 이후
이제 겨우 100일. 절대 잊지 않겠다던 글씨조차 지워지고
29회-지워지고
하지만 문제를 푸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다면 해답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저 시간이 걸리는 간단한 일일 뿐이다. 10회-풀 수 없는 문제 下에서 수학 선생님이 예은이가 틀린 답을 내놓았는데도 왜 입을 다물고 계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내 앞에 놓인 노트를 봤다.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수식이며 이렇게 끝났다.
“=4”
예은이는 칠판을 다시 살펴 보았다. 자기가 빼먹은 걸 알아차리겠지.
“아.”
a(1-r) = 2/(1-1/2)=4
4에 동그라미를 쳤다.
10회-풀수 없는 문제 下
3
여기서 나는 작가의 의도와는 다를지 모르는 가정을 하나 세워보려고 한다. 탐정은 꼭 문제를 해결해야만 할까? 탐정은 사실 문제를 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
추리소설에서 탐정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추리소설은 풀리지 않은 문제들을 풀린 문제로 바꾸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애매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눈다. 물론 그 행복은 다른 이의 불행을 무시하고 덮어버릴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거짓된 것이다. 하지만 탐정이 이야기에 개입하고 인과관계가 명확해지면서 불확실한 영역에서 존재했던 행복은 확실한 불행으로 바뀐다. 누가 가해자인지 문제가 풀린 뒤에도 피해자가 받은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추리소설에서 행복은 문제가 풀리지 않았을 때에만 위태롭게 존재할 수 있다.
12회, 16회, 26회에 걸쳐 예은이 세영에게 하는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너도 이해 못해.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할 뿐이잖아. 내가 아무리 말해도 안 믿을 거잖아.’
12회-필담
다 뒤죽박죽이야. 모순 덩어리야. 너에게 미안하다가 화가 나기도 해. 너도 날 이해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안심이 되고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져. 그러다가 또 무서워져. 슬프다가도 기뻐. 수학이 조금 재미있다가도 지쳐. 수학 문제를 풀다보면 네 생각이 나. 행복해지다가 또 외로워져.
16회-전화
갑자기 모든 게 잘 풀리는 것 같으면… 오히려 불안하잖아. 네가 어떤 패를 들고 있는지 모르니까. 뭔가 숨기고 있을 것 같아. 모든 걸 다 걸기에는 겁이 나.
26회-기다릴게
예은이 하는 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말로 서술되어 있지만 결국 한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낸 것이다. n차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는 조건 n개가 필요하다.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작가는 예은에 대해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지 않으며, 세영의 추론은 발전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작가는 문제가 풀리는 것을 캐릭터의 행동을 조정하며 막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는 달바라기 님의 리뷰 ‘일상의 문제들’에서 지적되었던 이야기 진행에 대한 집중력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렇듯 추리 소설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이야기의 흐름은 소설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풀 수 있는 문제에 알 수 없는 조건을 추가하여 풀 수 없는 문제로 만든다. 11회-눈물의 출처와 17회-두 사람의 밤과 낮에 나타나는 세영의 독백을 살펴보자.
그저 내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데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왜 예은이 울었는지 알았다. 엄밀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11회-눈물의 출처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세준이는 아직 중3이고 첫 사랑이었다. 완벽할 수가 없다. 많은 잘못들을 했고 나에게 이야기한 것도, 숨기고 있는 고민도 많다.
이번에는 뭔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냥 나도 안다. 사랑이 행복하기만 하진 않다는 걸.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세준이를 보고 알았다.
17회-두 사람의 밤과 낮
이 두 인용구는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왜 예은과 세준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는 세영에게 이 두 문제는 엄연히 풀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세영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논리에 추가함으로써 문제를 풀 수 없는 문제로 만든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초기조건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답을 낼 수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 어떤 면에서는 두 등장인물들의 사고 그 자체에 내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추리소설 속의 등장인물답게 그들은 정보를 얻고, 이를 이해하며 논리를 쌓아가지만 이를 문제를 푸는데 의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24회-거짓말에 나타나는 예은의 독백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들 이렇게 나를 걱정해주는데, 왜 안 괜찮은 걸까. 아무 고민 없이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24회-거짓말
4
세영과 예은을 이해할 수 있겠냐고 작가는 나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연히도 다른 곳에서는 아마 쉽게 살아갈 수 없을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학교를 거쳐왔고, 노력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재능의 무서움을 수없이 보았다. 먼 곳에서 우연히 결정되는 것들은 우리의 삶을 요동치게 했고, 이 모든 것들은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 모든 괴로움에 나름의 방식으로 맞서는 아이도 물론 있었다. 자습실 자리 옆에 우울한 자자가시를 붙여두며 말이다. 제목도 내용도 더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록색 칸막이와 대조되던 포스트잇의 노란 색깔만은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노트에 휘갈겨 적은 글들을 포스트잇에 정자체로 옮길 때 아이가 지었던 그 표정을 인물들에게 덮어씌워보며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아마 우리는 같은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빈틈없는 논리로 짜인 수학은 아름답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동의할 때만 의미를 가지는 낱말들로 짜인 문학 또한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그 아름다움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완전하게 태어난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견딜 수 없다. 논리는 스스로를 향하고, 자신을 갉아먹는다. 한켠 님의 리뷰 “선”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소설 속 인물들은 스스로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깊이, 더 깊이 마음속으로 떨어진다. 스스로를 모두 불태워 재만을 남길 뿐이다.
이러한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스로를 찌르는 논리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고, 문장으로 뭉쳐져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을 흩어놓아 해체해버린다. 24회-거짓말에서 이러한 예은의 방어기제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를 풀 수 없었다. 숫자도 기호들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에게는 이렇게 말했었다. “분명 글을 읽는데… 문장이 아니라 단어들로 보여요.”
정확하게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분명 읽을 수 있었다. 생각하다 보면 무슨 의미인지도 알았다. 단지 그 모든 게 힘들었다. 공허한 기호들을 억지로 따라가야 했다.
24회-거짓말
이것이 추리소설에서 탐정이 행복해질 수 있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문제를 풀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 소시민적이고 비겁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때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투지를 불태우던 이들이 20년 후 즈음 ‘아 그때 우리는 참 순수했었지.’라고 회상하는 모습을 나는 비난할 수 없다. 그들은 더 이상 마음속에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문제를 덮어버림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택한 것 뿐이다.
나는 마음 속의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깨져버린 인물을 하나 알고 있다. 그녀의 글에 선명히 보이는 감정선이 고통스러워서 따라가기가 버거워 나는 그녀가 쓴 글을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말한다.
내용 없는 인간들이 나를 질식시킨다. 나를 절망 속으로 몰아 넣는다. (…)
그렇지만, 결국 속이면서 눈 감고 사는 것보다는 미쳐도 괴로워도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면서 (현실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 삶의 방식 속에 인간의 본질이 있는 것 (…)
가장 사소한 일에서부터 가장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기 성실을 지킬 것, 언제나 의식이 깨어 있을 것. 이것만이 어떤 새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나의 의무인 것이다. (…)
새까만 커피만이 주식이 되고 만 이 팽팽한 신경의 끊길 듯 한 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무관심이란다. (나의 생도 나의 사도. (…)
현실이나 일상적인 것과는 아무 타협없이 맑은 눈동자를 그대로 지닌 채 열심히 열심히 살아줘!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이런 삶의 방식을 다른 그 누구에게 권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모두가 이상화된 이미지가 아닌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5
모든 이야기는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고, 소설에는 마지막 장이 있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소설 속 인물들은 스스로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뒤 무언가를 건져내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능할지, 그것이 그들을 행복한 결말로 이끌어줄지 나는 솔직히 알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후반부를 보며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차려버린 인물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이것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디 작가가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