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사는 여자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92년 개봉된 로버트 저메키스의 작품이죠. 초등학생 때 본 영화였는데, 메릴 스트립의 쇄골이 섹시해서 기억이 남네요. 이 글과 위에 언급한 영화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불로불사의 약’ 이 나온단 겁니다. 그러나 주제는 판이하게 다르죠. 죽어야 사는 여자들의 주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라면, 이 글의 주제는 쏟아지는 것들에 대한 사유입니다(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화자는 낯선 이국의 땅에서 뜬금없이 마주친 키아누 리브스(그 키아누 리브스 맞아요. 매트릭스에 나오는)에게 핑크색 알약을 받고 불로불사의 몸이 됩니다. 희희낙락하며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온 사방팔방 분홍색 알약이 안 지나간 데가 없습니다. 불사의 권세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간 거죠.
갑작스레 너무나 큰 혜택이 손에 쥐어졌습니다. 상식은 무너지고,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의 풍경이 바뀝니다. 사람들은 신체와 장기를 손쉽게 전당포에 맡기고(약을 먹으면 고통도 느끼지 않습니다.), 무슨 트렌드 아이템처럼 몸을 바꿔 끼웁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의식마저도 칩에 복사당해 강탈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글쓴이가 보는 미래는 불편합니다. 디스토피아라는 단어로는 부족해요. 싸이코퓨처에요. 작가가 왜 키아누 리브스를 등장시켰는지 이해가 갑니다. 키아누 리브스는 매트릭스에서 온갖 정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는 초월자 ‘네오’로 분했었죠.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상현실속에서 나름 평범한 인생을 살아오던 토마스 앤더슨이 네오가 되기까지 매우 고된 훈련이 필요했었습니다 거대한 힘을 다루기 위해선 엄청난 인내와 노력이 동반된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죠.
흔히들 현대사회는 정보의 홍수라고 합니다. 여기서 조금만 고쳐보죠. 정보의 냉장고라고, 그것도 꽉 들어찬. 인터넷,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수 없이 많은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마치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는 것처럼요. 칼로리는 생각 안 한 채, 냉장고가 비어버릴 때까지 입 안으로 밀어 넣는 겁니다. 들어온 지식에 대해서 음미할 새도 없이, 곧바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거죠. 수박 겉핥기로요. 어쩌면 현대인들은 모두 정신적 소화불량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요.
후반부에 등장하는 브레인 좀비인 ‘소년’의 등장으로 불쾌감은 끝에 달합니다. 이 인물은 키아누 리브스의 대칭점에 있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글쓴이가 글을 쓰는 내내 경계하면서 적대감을 불태우며 쓰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밑바닥을 모를 욕망을 가진 소년은, 남의 신체로 온 몸을 갈아치운 것도 모자라,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지식과 의식을 빼앗아 자신의 뇌에 집어넣었습니다.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고는 있다지만, 글쎄요. 스스로 곱씹고 쌓아올린 게 아닌, 타인의 흔적들로 자신을 채워 넣고 그걸 ‘나’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좀 웃긴 일이겠죠.
작가는 글을 통해서 지식은 있지만 지혜는 없는, 눈 돌리고 싶은 불편한 자화상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미뤄왔던 것들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 말이죠.
3번째 리뷰였습니다. 지루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