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이라는 알리바이와 거울과 자기연민 공모 브릿G추천

대상작품: 또 다른 풀이법 (작가: soha, 작품정보)
리뷰어: 주렁주렁, 18년 5월, 조회 116

김지훈에 대한 괴기한 이야기들을 말하자면 며칠 밤을 꼬박 새더라도 모자랄 것이 없다. (…)

나는 그와 고등학교 2년을 같이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만난 적은 없다. (…)

그럼에도 나는 이 이야기를 말해야만 한다. (…)

 

1.

soha 작가님의 [또 다른 풀이법] 의 도입부 문장입니다. 고전적인 패턴이지요. 김지훈과 관련한 기괴한 이야기라고 운을 뗀 뒤에 같이 고등학교 생활을 한 ‘나’에 대한 근거를 밝히고는 비장하게 “나는 말해야만 한다”고 천명하고 있어요.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만난 노인이 괴담을 말해준다거나 뭘 계기로 옛날 겪었던 기괴한 일을 말해준다거나….익숙한 느낌이 들면서 고전적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배경은 한국의 고등학교이니 보통의 기담과는 다를 거란 기대감도 주고요. 또 김지훈이 얼마나 기괴한 인간이려나 두근두근 하기도 하고요.

나는 고교 입학후 미래가 결정되었다는 걸 알아버리고는 무난하게 사는 삶을 선택합니다.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적당한 태도를 취하지요. “나는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였고, 그 대가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수학 숙제가 떨어지고 그는 평소처럼 진지하게 않게 숙제를 처리하지요. 하지만 의도치 않게 이 숙제로 김지훈과 얽히게 됩니다. [또 다른 풀이법]의 중심 내용입니다.

“김지훈에 대한 괴기한 이야기를 말하자면 며칠 밤을 꼬박 새더라도 모자랄 것”이라고 화자는 얘기를 시작하지요. 그저 관찰자로서의 김지훈을 설명할 것처럼요. 타인의 눈에 비친 김지훈이란 주인공을 설명할 것처럼요. 하지만 다음 문장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꽤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입니다. 김지훈 얘기가 아니라 자기 얘기만 한참을 합니다. 내가 설명하는 나를 보면,

그들은 우리와 같은 강에서 헤엄치고 있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와는 다른 아이들이었다.

올라갈 수 없는 나무를 바라보기보다는 그 아래에 있는 그늘에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나는 그들과 찌감치 떨어져 있으려 노력했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데 나와는 주로 다른 아이들과의 차이점을 말하면서 자신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나는 남과 다르다. 나의 수학 문제 풀이를 본 김지훈이 다가오자 나는 김지훈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거든.” (김지훈이 나에게 하는 말)

나는 고개를 들어 김지훈의 표정을 살폈다. 김지훈은 미소짓고 있었다.

김지훈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퍼졌다.

“나도 할 수 있으니 너도 할 수 있어.”

김지훈은 공포에 가득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김지훈은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알고 있었어. 네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한테는 없는 것을 말야.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하지 못했을 거야.” 대단하지 않나요.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말해준다는게. 그만큼 김지훈이란 캐릭터가 순수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저는 화자 본인이 듣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존재로 김지훈이란 인물을 소환해낸 것 같았습니다. 나름의 여러 이유로 노력하지 않고 진지하게 않게 살아가는 내 앞에, 남들이 다 인정하는 천재가 나타나, 평소처럼 대충 했는데도, 나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격려해주고 심지어 고맙다고 까지 하는 걸요. 굉장한 자기 연민이라고 느꼈어요. 이 소설 전체가 하나의 알리바이란 느낌도 받았습니다.

 

2.

언젠가 애청하던 심리학 팟케스트에서 심리 상담사들이 이런 말을 했었어요. 기억이 틀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대충 이런 말이었어요. 사람들은 흔히 변하고 싶어서 심리상담을 받으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느낀 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는 더이상 삶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위기를 느꼈을 때,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계속 삶을 굴리고 싶어서(지금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서) 심리상담소에 찾아온다.

[또 다른 풀이법]을 읽으면서 계속 저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원한 적도 없는데 김지훈이 나타난단 말이지요. “왜 하필 난데”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라는 나의 말은 당연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굴려왔던 방식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걸요. 분노겠지요. 그 감정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김지훈의 팔이 나를 향해 촉수처럼 뻗어나왔다. 나는 김지훈의 손이 내 어깨를 잡은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당연히 잊을 수가 없겠지요. 김지훈이 그냥 거울이라면 깨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사람이지요.

 

3.

저는 [또 다른 풀이법]을 뭐랄까요, 읽으면서 무서운 건 아닌데 소름 끼친다고 해야하나, 징그럽다고 해야하나, 제 피부에서 뭔가 기어다니는 느낌? 다 읽고서 ‘완전 호러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soha님의 [루아님의 작품세계에 대한 리뷰]를 읽고 리뷰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와 일맥상통하는 느낌인데, 나와 타인의 경계를 계속 허물면서 소설 전체가 하나의 알리바이, 하나의 기분 나쁜 꿈으로 묘사하는데 강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저는 정신분석학 방법으로 분열된 자아라거나 제2의 자아라거나 또 다른 나, 내 안의 괴물….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걸 싫어하는데, 읽다 보면 그런 분석방법이 계속 떠오른단 말이지요. 섣부르게 작가를 어떤 틀 안에 가두는 건 아닐까 고민이 안 되는 건 아니나, 이렇게까지 ‘일종의 또 다른 나’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건 강점이 아닐까 싶은 겁니다. (사실 읽으면서, ‘아아 내가 전문 편집자라면 soha님 이 장점을 살려 장편 심리 스릴러를 쓰십시요 라고 했을지도 몰라’란 생각을 했습니다.)

덧.

작가 코멘트에서  “여러분의 삶에도 김지훈이 있었나요?”라 하시더군요. 글쎄요, 김지훈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제 삶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 더이상 굴러가지 않을 거라는 공포를 느껴본 적은 있습니다.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온 몸이 강제로 해체되는 느낌이지요. 태어나서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절망스럽고요. 깨닫기 이전의 삶으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어요. 설사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 소설이 저를 끌어당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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