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 [짝사랑 문제] 의뢰 브릿G추천

대상작품: 짝사랑 문제 (작가: 별고양이, 작품정보)
리뷰어: 한정우기, 18년 5월, 조회 109

본 글은 [짝사랑 문제]에 관한 리뷰 글입니다. 추리적 요소가 있는 글이기에 제 리뷰가 감상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아직 글을 읽지 않으셨다면 감춰지지 않은 부분만 읽으시면 됩니다.

[짝사랑 문제]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텍스트입니다. 주요 인물인 세영과 예은은 항상 고민하는 상태이고, 이 글을 쓰는 작가도 계속 고민을 하지요. 세영과 예은이라는 캐릭터에 작가의 모습이 투영되었다는 말도 자유게시판의 ‘오늘의 문장’을 통해 STELO님이 직접 말했구요. 심지어는 글을 읽는 독자도 고민을 합니다. 이 소설은 추리/스릴러 소설이거든요. 초반에 등장한 단서가 단서인 줄도 모르고 읽다가 한참 읽다가 이게 단서였구나 깨닫게 되더라구요.

 

제가 이제껏 리뷰를 썼던 글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읽은 텍스트인데요. 그래도 아직 답을 모르는 문제가 상당수입니다. 아마 저의 고민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

 

[짝사랑 문제]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 내 인용과 작가의 말입니다.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안개의 나라’ 김광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눈물 속으로 들어가봐 거기 방이 있어.” – ‘눈물의 방’ 김정란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 ‘병원’ 윤동주

 

 

예은이 세영에게 질문하던 구절인데요. 하나하나 검색하며 찾아봐야했답니다. 누구의 시고 시의 제목이 무엇인지도 다 검색해서 알게 되었죠. 반면 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시도 있었습니다.

 

“세계가 기울기 시작했고, 나는 저 밑으로 밑으로 미끄러져.”

 

자유게시판 내에서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죠. 이 시는 예은이 창작한 시라는 걸요. 또 다른 게시글을 통해, 예은이 이 시를 창작하게 된 계기가 세월호 때문이었구나 라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빼빼로데이 날, 오늘이 어떤 날인 줄 아냐는 혜경의 질문에 세영이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답은 그때그때 달랐다. 하지만 그 날은 나도 답을 눈치 챘다. 화요일이었다. 2일 전이었고 210일 째였다.

11월 11일이었다.”

 

아마 2일 전은 수능을 기점으로 한 것일 테고 210일 째는 세월호 이후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210일째가 세월호를 의미하는 거라는 건 ‘오늘의 문장’을 통해 작가님이 밝힌 부분입니다.) 작가가 텍스트 내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말에도 캐릭터가 하는 고민을,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이 생각하는 고민을 넣었지요.

 

[짝사랑 문제]는 허투루 쓴 부분이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도 작가가 평생 동안 해왔을 수많은 고민들이 캐릭터의 입을 통해서 언급되고, 답을 내리지는 않지만 도망치지도 않는 (작가의 말을 인용, 슬릭의 노래가사를 재인용해 말하자면 “답이 없다면 답을 하고 싶지 않은 것 뿐 도망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제를 직시하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작가의 고민이 그대로 보이는 글이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고민을 드러내고 솔직하게 대면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시를 생각하면 사실 제 머릿속에는 딱 두 명의 시인이 떠오르거든요. (제가 아는 시인이 많지 않아 그렇기도 하지요…) 사실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대면하다 보면 항상 ‘부끄러움’을 가질 수밖에 없잖아요. ‘부끄러움’하면 떠오르는 시인은 윤동주와 김수영이죠.

저는 사실 윤동주보다는 김수영의 시를 더 좋아하는데요. [짝사랑 문제]는 김수영보다는 윤동주의 감수성과 더 닮지 않았나라고 생각해봅니다. [짝사랑 문제]에서 자주 인용되기도 하였고 ‘오늘의 문장’에서도 자주 언급되던 시인이지요.

윤동주의 시 중 정말 유명한 시로 ‘쉽게 쓰여진 시’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짝사랑 문제]에 나오는 세영과 예은이 그리고 작가님이 이 시와 닮지 않았나싶어요. 특히 이 구절이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세영과 예은이 처음으로 포옹을 하던 부분은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라는 구절과 딱 들어맞는 것 같아요.

 

제가 요즘 가장 고민하고 있는 건 “문학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이 아닌가.”와 “문학은 이제껏 ‘교언영색’이었을 뿐인 것은 아닌가.”라는 말이랍니다.

 

이 말은 대만작가인 故 린이한이 죽기 전에 찍었던 영상인터뷰에서 독자들에게 던졌던 질문이었지요. (린이한 작가의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꼭 읽어보세요. 이 글은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작품을 통해 이야기한 글입니다. 혹시라도 이런 소재에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으시는 분들은 읽지 마세요ㅠ)

 

린이한 작가가 의문을 가진 것은 그렇게 아름다운 말,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폭력을 자행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비디아다르 네이폴이 자신의 아내를 학대했다. 창작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오리엔탈리즘]을 쓴 세계적인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도 겉과 속이 다른 소인배였다. (이 말을 듣고 사실 저도 엄청 놀랐습니다. 저는 사이드가 쓴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장아이링(장애령,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적 여성작가)을 사랑한다는 후란청이 어떻게 다른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가. 열 세 살의 팡쓰치를 강간한 쉰 살의 문학 선생 리궈화가 그녀에게 뱉은 말들. 그 아름다운 말들. 문학작품의 구절을 인용하고 시를 읊으면서 어떻게 그런 폭력을 자행할 수 있었는가.

린이한 작가가 또 이런 말도 하더군요. ‘시경’의 서문에 나오는 말인 ‘재심위지, 발언위시(在心為志, 發言為詩, 마음에 있으면 뜻이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와 공자의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를 우리 모두 알지 않냐고. ‘사무사’는 공자가 ‘시경’ 300수를 한 마디로 정의한 말이지요. 이 말들은 중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다 아는 말입니다. (특히 대만 중문과는 학풍이 매우 보수적이라 고전문학을 중요시합니다.)

소설 속 캐릭터인 리궈화도 이를 알고 있었겠죠. 그리고 리궈화의 원형인 모 선생도 이를 알고 있었을 거구요. (리궈화의 원형이 실존하는 사람이라는 건, 자신의 선생이라는 건 린이한 작가가 인터뷰에서도 밝힌 내용이구요.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팡쓰치가 자신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작가가 자살하고 난 뒤에 가족들이 밝힌 거에요.)

 

작가가 고통스러워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이 시를 읊고 사랑을 속삭이는 모든 말들은 사실 자신의 진심에서 나온 말인데, ‘정(情)’이 있고 ‘지(志)’가 있는 자들이 ‘사무사’의 상태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폭력을 자행할 수 있을까. (작가 린이한은 문학의 형식과 본질이 꼭 일치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텍스트를 왜곡하고 오용하며 뒤틀린 욕망을 따랐죠. 린이한 작가는 그들도 사랑을 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다만, 그들이 사랑한건 자신이 강간한 여인들이 아니라 자신이 내뱉은 말을, 그 분위기를, 그 장면을, 그 순간을 사랑했을 거라구요. 린이한 작가는 그들이 기형적으로 뒤틀린 자신들의 생각을 감추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그 간극을 메운 방법이 바로 비유와 수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학적 기교가 이들의 자기합리화를 도운 거죠.

 

그리고 독자에게 질문합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교언영색인 것이 아닌가. 이제껏 교언영색이었을 뿐인 것은 아닌가.

 

사실 저는 문학과 ‘교언영색’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공자가 말한 ‘교언영색’의 개념과 제가 생각하는 ‘교언영색’의 개념은 좀 다르지만요. 저는 ‘교언영색’이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교언영색’은 말이 주는 즐거움이거든요. 말의 결이 주는 즐거움. 환유와 은유가 주는 즐거움. 수많은 상징과 기호들이 주는 즐거움. 솔직히 날 것 그대로보다는 기표가 기의를 지배하는 세상, 시뮬라크르로 가득 들어찬 세상이 더 재미있으니까요.

좀 더 변명을 하자면, 저는 은유와 환유가 공백과 여지를 만들어주기에 오히려 더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 낸다고 생각했답니다. 텍스트가 창작자의 손을 벗어난 순간부터 텍스트는 창작자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니까요. (작품의 소유권이 넘어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작권은 중요하죠. 흠흠)

 

리궈화와 후란청 같은 인물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문학을 오용하고 왜곡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이지 문학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린이한 작가가 말하는 ‘교언영색’이 문학의 일부 속성일 수는 있으나 문학 자체가 ‘교언영색’에 불과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일부 문학이 ‘교언영색’에 불과할지라도 작품의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근데, 요즘은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윤택, 오태석, 김태웅 등 공연계 미투에서 일차 충격을 받았고, 린이한 작가의 인터뷰를 보며 이차 충격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텍스트와 작가를 직결시킬 수는 없지요. 하지만 작가와 유리된 ‘교언영색’만이 남은 문학이, 진실성이 없는 문학이, 기교만 있는 문학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린이한 작가가 제기한 저 질문이 창작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물론 현재 진행 중인 고민이고 과연 제가 이 질문에 관해 평생 답을 내릴 수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시기에 [짝사랑 문제]를 읽어서 그런 걸까요. 저는 [짝사랑 문제] 속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고민의 흔적이 보여서 정말 좋더라구요. 진실성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텍스트를 통해 작가를 파악할 수는 없기에 작가에 대한 제 생각은 자유게시판에 올린 ‘오늘의 문장’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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