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의뢰를 받았습니다.
저는 늘 한 문장으로 요약을 하고 글을 씁니다. 처음에 저는 이 소설을 읽기가 꺼려졌습니다. 리뷰 의뢰를 받고 소설을 읽으면서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글을 다 읽고나서 곰곰히 생각을 하면서 다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소설은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지 않다.”
이 말을 하나씩 풀어가보겠습니다.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잠시 뒤로 가주시길.
이 소설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과학
과학은 차가운 이성의 산물이라고들 하죠. 하지만 과학은 감성적이며 낭만적일 때도 많습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면 알 수 있겠죠. 이 거대한 우주,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 놀라운 신소재들, 마음을 복제하는 과학 기술… 이 모든 것은 아름답지 아니합니까.
‘마리 멜리에스’ 역시 그런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두 사람이 거대한 우주 엘레베이터와 탄소 나노 튜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은하수로 머리를 감고 싶다”고 하는 말, 마인드 업로딩 기술… 이 모든 게 아름답지 아니한가요.
저 역시 그런 아름다움을 쫓아서 물리학과에 진학했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사랑
제가 물리학과에 처음 진학했을 때, 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대부분 성적에 맞춰서 학교에 왔을 뿐 물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고요.
사실 그래요. 과학은 예쁘고 컬러풀한 우주 사진이 아니거든요. 끝 없이 이어지는 수식들, 연습 문제, 학점, 흑백 글자와 그래프로 가득 찬 논문들일 뿐이죠.
그러니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껴요.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주인공과 서월이 서로 사랑하게 된 이유도 이해가 갔어요. 제가 서월이었다고 해도 매일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하게 되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과거를, 사랑을 기쁘게 상상했어요.
아름다운… 그리움
사람들은 애절한 이야기를 좋아하죠.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 힘이 되어주고 싶어집니다.
주인공은 자동차 사고로 아내 서월을 잃었습니다. 이야기 마지막에 나오듯 사고 원인은 아마도 제조사 과실로 인한 자동차 결함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아내가 힘들어 할 때, 들어주기는 커녕 몰아붙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내는 뭔가 하려던 말이 있었지만 끝내 말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품을 뒤져봤지만 아내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죠. 주인공은 점점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주인공이 아내를 되찾으려 하는 게 과연 잘못된 결정이고 어긋난 사랑일까요. ‘죽어버린 사람을 되살리려는 이야기’는 사실 익숙합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움을 집착이라 생각하지 않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죄책감은 정말 아름다운 걸까요.
왜 자꾸 죽은 여자를 찾아 헤매는가
저는 ‘영화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과제로 1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영화 시나리오를 썼는데요. 저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서 그 시나리오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감상을 남겼었습니다.
그때 저는 수 십명의 여자들이 죽는 걸 봤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아픈 과거를 지닌 남자들이 끝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시나리오들을 읽으면서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뿌리가 깊습니다. 한국 근대 소설에서 ‘소나기’ 역시 여자아이가 죽으면서 끝나죠. 교과서에서 보셨을 ‘기억 속의 들꽃’1이라는 작품도 떠오릅니다.
왜 이런 이야기들이 매혹적일까요.
죽음은 아름답고 애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애절한 죽음을 좋아합니다. 작가들은 잔인한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남자 캐릭터의 강렬한 동기를 그리기 위해서,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년기를 벗어나는 성장을 위해서,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위해서 여자들을 죽여 왔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마리 멜리에스’ 역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분들이 쓴 리뷰를 읽고 저는 이 이야기를 읽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리뷰 의뢰가 없었다면 지금도 읽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유를 말해보자면 저는 사람이 죽는 이야기를 읽기 힘들어합니다. 특히 아내나 애인, 딸이 죽는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동명 소설집을 따서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고 부릅니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2
저는 추리 소설을 읽습니다. 추리 소설에는 ‘시체가 나와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사건도 이야기도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피해자는 죽었기에 말을 할 수 없다고들 하죠. 그렇기에 탐정들은 누가 피해자를 죽였는지 찾아냅니다. (Who done it) 동기가 무엇인지 왜 죽였는지도 알아냅니다. (Why done it) 범인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합니다. 물론 때로는 남겨진 사람들이 복수할 수 있도록 눈감아주기도 하죠.
저는 어느 쪽이든 불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건 얼마 안되는 단서들 뿐이기에 그저 추측할 뿐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아니, 죽은 자는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작가들은 말합니다. 살인자가 악당이라고요. 피해자들이 아픔을 표현하지 못하게 막은 건 범인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저희는 속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이죠. 작가들은 사람이 죽지 않는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여자가 죽는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한 건, 살인자를 만든 건 작가입니다.
물론 ‘마리 멜리에스’는 추리 소설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살인이 아니라 아내의 자살을 다루고 있습니다.3 하지만 주인공이 그 자살에 책임이 있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가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살인과 마찬가지로 서월은 죽었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마리 멜리에스’에서 주인공은 서월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지만 듣지 않습니다. 서월은 죽어버리고 어떤 유서도 기록도 남기지 않습니다. 인공 장기로 다시 살아난 서월은 모든 아픈 기억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서월이 마지막으로 하려 했던 말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서월은 자신이 겪은 아픔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독자 역시 서월이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자들은 ‘여자 없는 남자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밖에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과거를 추억하고 아픔을 감히 짐작하려 하지만… 그건 서월이 직접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독자는 서월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하고 추측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작가님은 이렇게 아픔을 감추고 궁금하게 만듭니다. 미스터리는 알 수 없기에 아름다우며… 재미있습니다. 눈길을 끌죠. 그래서 마리 멜리에스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경 쓰입니다. 서월이 끝까지 하지 못했던 말은 뭘까?
사실 그 말이 별 거 아니었다면, 그저 한 남자가 자책하며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면… 왜 서로 소통하지 못한 채 계속 아파해야하는 걸까.
왜 서월은 다시 비극적으로 죽어야만 했을까. 그건 정말 기술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작가들이… 아니 우리가 그런 비극을 원하기 때문일까.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계속 추리해보려 합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가는 첫 번째 단서는… ‘자기 동일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입니다.
서월은 서월이다.
눈치채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마리’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서월’이라고 불렀죠.
저는 이 소설이 계속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을 자꾸 마리라고 불러서요. 그 사람은 서월입니다. 마리가 아니라, 기억을 잃고 신소재로 만든 몸에 들어간 ‘서월’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른 리뷰에서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비유는 철학자들이 ‘자기 동일성’을 설명할 때 즐겨 쓰는 비유입니다.
자기 동일성이 어떤 개념인지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10년 전에 한 여자아이를 짝사랑하는 중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군인입니다. 그렇다면 중학생인 저와 군인인 저는 같을까요? 50년 후에 노인이 된 저도 같은 사람일까요?
우리는 보통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우리는 같은 사람이니까요. 자기 동일성은 그런 개념입니다.
비슷하게 제가 기억 상실증에 걸려서 군인이라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던 중3 때로 돌아갔다고 해봅시다.
그래도 저는 저일까요?
또 제가 암에 걸렸다고 해봅시다. 저는 살기 위해서 ‘공각기동대’에 나오는 것처럼 인공적으로 만든 신체에 제 기억을 옮겼습니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영혼이 다른 몸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요.
그래도 저는 저일까요?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답하셨다면4 저는 묻고 싶습니다.
왜 마리는 서월이 아닌가요? 왜 서월은 자기 사랑이 남의 것이었던 것처럼 아파해야 했을까요? 왜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을까요?
주인공의 서술트릭
하지만 주인공은 기억을 잃고 신소재로 만든 인공 신체로 만들어진 사람은… 서월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둘을 구분하고 ‘마리’라고 이름을 붙였죠.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월이 스스로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한 건 아닙니다.
왜 우리는 마리는 서월과 다르다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이게 주인공이 짜둔 미스디렉션, 서술트릭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은 무심코 주인공의 시점에 공감해버린 걸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가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할 겁니다. 기억나진 않지만 제가 저질렀던 과거들을 ‘제가’ 한 일이라고 받아들일 겁니다. 그리고 제 삶을 계속 살아가고 싶고, 저를 저로 인정해주길 바랄 겁니다.
주인공은 당연히 서월의 것인 과거들을 숨겼습니다. 서월이 과거를 알면 자신을 미워할까봐 두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것은 ‘서월’이 가진 권리라고 믿습니다.
물론 서월도 헷갈렸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리가 서월이라는 건 제 의견일 뿐이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리가 서월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리는 서월의 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과거를 알 권리가 있던 게 아니었을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범인에게 보기좋게 속아넘어간 걸지도요. 이 역시 아름답습니까?
리체르카님은 주인공이 구원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쓰셨지요. 저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잃은 서월이 주인공에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만, 결국 주인공을 사랑하는 건 변함없습니다. 입맞춤을 하고 사랑을 나누죠. 그 감각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 번 죽었던 서월은 너무나도 평온하게 다시 죽음을 맞이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상했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서월은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서월은 계속해서 주인공을 생각하고, 경청하고, 배려합니다. 그 사랑이 느껴집니다. 사랑으로 나를 기억해달라는 대사는 매력적일지 모르나, 살아남은 자들을 구원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결국 서월은 자살한 게 아니라, 그저 자동차 회사의 과실이었던 걸로 밝혀집니다.
서월의 두 번째 장례식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근지구 궤도 장례에 대한 주석과 설명들은, 이 과학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이게 구원이 아니라면 뭘까요?
물론 그래도 여자 없는 남자들은 항상 죄책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죄책감도 결국 이기적 감정이 아닌가요. 저는 뒤늦게 후회하는 남자들을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면 아픔을 전하고 이해하고 갈등을 풀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모든 아픔은 그저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뿐입니다. 시체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차갑죠.
해피엔드를 좋아하고 비극을 싫어했던 게 아닙니까? 사람이 죽는 이야기는 싫었던 게 아닌가요?5
어쩌면 이건 제 주관적인 취향일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써온 이야기는 그저 제 감정들을 합리적으로 포장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아니, 이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다.” 서월을 다시 죽였기에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게 되었다고요.
저는 힘들었던 어느 날에 이 답을 믿기로 했습니다. 사람이 죽는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다고요. 그 어떤 아픔도 아름다울 수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아픔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들을 보고 싶습니다. 그 아픔을 위로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기억을 이어나가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그 아픔들을 복원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하지 못한 일들을 이어가야할까요?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 될까요?
저는 주인공이 그런 고민을 얼마나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니, 서월의 이야기를 알고 싶습니다. 저는 남자로서 그 아픔을 들어줘야할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여자들이 아픔도 기쁨도 숨기지 말고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이 아픔들을 기록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이 이야기, 아니 서월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 드리는 답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모두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