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월스트리트 세태를 풍자하기로 유명했던 프레드 슈드는 투기와 투자가 구별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한 바가 있죠.
‘10대 소년에게 사랑과 욕망이 다른 것이라고 설명해주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이죠. 물론 그 소년은 자신이 사랑과 욕망의 차이를 안다고 어렴풋하게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또 어디까지가 욕망인지는 알기가 참 어렵죠. 우리 모두가 경험했듯이.
사랑도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강요하거나 상대방의 의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내 뜻대로 상대방을 끌고 나갈 때 그러하죠. 그렇게 집착과 지배는 사랑이 폭력으로 변질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사랑이 감정의 산물이긴 하지만 그 사랑이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선 이성에 기반을 둔 의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고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좀 더 배려하고 존중하는 의지가 말이죠. 그런 의지가 없다면, 사랑은 최근 여러 보도에서 보듯, 사는 집을 찾아가 구타하는 것은 물론 염산을 얼굴에 끼얹거나 방화를 하는 등의 엽기적인 데이트 폭력으로 쉽게 변해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스토커도 마찬가지겠이요.
그는 사랑과 욕망을 구분할 줄 모르는 10대 청소년과 같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유아라고 해야겠네요. 타인의 의사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사랑만이 절대적이라 여기고 자기가 사랑하면 무조건 남도 자기를 사랑한다고 확신해버리니까요.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에 따르면 사람의 정신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거울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단계죠. 그 ‘거울 단계’를 거치는 것이 바로 유아 때입니다. 보통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인 것이죠. 스토커의 사랑이란 바로 이 거울 단계와 같으니 그들 역시 6개월과 18개월 사이의 유아 수준이라 해야할 것입니다.
갑자기 스토커 얘기라 이상하셨죠?
그건 제가 ‘사이코메트리 스토커’란 소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연재중입니다. 제목에 끌려 읽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키바야시 신의 만화 ‘사이코메트러 에지’가 생각나 그런 초능력자가 나오는 스릴러로 생각했습니다. 스릴러로 여긴 건, 제목의 나중에 나온 스토커 때문이었죠. ‘스토킹’은 스릴러의 흔한 소재이니까요.
생각해 보면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가진 스토커만큼 무서운 존재도 또 없는 것 같습니다.
스토커가 잘 하는 일이 추적과 감시를 통한 정보 수집인데, 스토킹하는 대상이 쓴 물건만 만지면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다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물건만 만지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다 알아낼 수 있는데다가 속에 감추고 있는 비밀까지 들킬 수 있는 판이니 정말 이만큼 공포스런 스토커도 또 있을까 생각되네요. 만일 그 스토커가 탐정이나 형사 같은 정의의 편이면 히어로 물일테고 그 반대에 서 있다면 호러물이겠구나 생각하면서 첫 장을 읽었습니다.
제가 맨 앞에 10대 청소년의 사랑과 욕망 구별 운운한 것은 프롤로그에서 작가 또한 그 점에 유념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런 말에 나타나 있더군요.
그녀로썬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달을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초승달이 되기도 하고, 그믐달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보이는 사물의 모습. 사람도 다르지 않겠죠. 바로 그런 경우를 소설의 주인공 채희정이 당합니다. 그녀는 의류회사를 다니다 퇴사하고 온라인 의류 쇼핑몰을 하다 실패하여 현재는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느 날 혼자 찾아온 손님이 그런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다른 손님이 실수로 두고 간 의류 쇼핑 가방이 계기였죠.
도대체 누가 두고 간 것일까 채희정이 궁금해하고 있는데, 혼자 초능력에 대한 책을 읽고 있던 남자가 대뜸 중년 남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정말 중년 남자가 자기 딸에게 줄 선물이라며 쇼핑 가방을 찾아 옵니다.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이냐고, 그 남자를 다시 한 번 만났을 때에 채희정이 묻자, 남자는 자기가 실은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대뜸 이런 말을 합니다. 채희정 남자 친구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고.
이 무슨 별꼴인 말인지.
화가 난 채희정은 그 때부터 남자를 멀리하기로 하는데, 이 남자 이상합니다. 그 때부터 계속 채희정을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나타납니다. 채희정은 겁을 집어 먹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동선을 잘 아는 것이 그가 말한 대로 사이코메트리 능력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죠. 네, 여기서 밝혀졌습니다. ‘사이코메트리 스토커’는 바로 그 남자, 김지훈이라는 것이.
그렇다면 이것은 호러일까요?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또 한 번 비틉니다. 즉 그가 사이코메트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를 전개시켜가면서 내보이는 겁니다. 그는 과연 사이코메트러일까요? 아니면 그냥 광기에 빠진 스토커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보는 위치에 따라 초승달도 되고, 그믐달도 되었던 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 정체성일지, 그 역시도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것이겠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앞서 말한 10대 청소년의 사랑과 욕망이 그러하고, 누구나 사랑을 하면서 쉽게 빠질 수 있는 지배와 집착도 그러할 것입니다. 누가 딱 기준선을 정해주면 좋겠지만 물론 그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대로 된 사랑은 알고 보면 혼돈과 불안의 과정입니다. 누군가는 사랑을 수영에 비유했던데,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물처럼 끝없이 요동치는 그것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자신을 길들이지 않으면 사랑은 이별이란 익사의 운명을 맞이할 테니까요.
그럼, 모든 것이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니, 그 상대적인 진리의 한계 안에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두 손 놓고 있어야 하나 하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건 바로 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그렇게 달라질 수 있으니 우리 자신도 훌쩍 자신의 입자에서 보는 것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장에서 나를 바라봐야 한다는 그 명령인 것이죠.
포르투칼의 유명한 시인 페소아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사유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사유란 질 들뢰즈가 말했던 것과도 비슷하게 무엇보다 ‘타자 되기’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타자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자기 중심에만 빠진 사유를 그녀는 ‘무사유’라고 불렀고 ‘악은 바로 무사유 자체이다’라고 말했었죠. 우린 이 무사유의 모습을 소설에서 여실히 확인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나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 그 혹은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나보다 더 상위에 두려는 지극히 이성적인 행동. 이제 우리는 사랑을 그렇게 정의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소설처럼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가진 스토커가 나타나도 더이상 두렵지 않겠죠.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 상대가 생각하는 사랑과 행복의 상태로 자신을 맞춰 갈테니까요.
낭만이라는 감정에 기대는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을 더 낮추려는 의지를 낳는 이성에 기대는 사랑. 이런 사랑의 형태를 ‘사이코메트리 스토커’를 읽으며 생각해 보는 것도, 사랑과 평화의 계절인 이 봄에 참 어울리는 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