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러시아 요리 중 한국식 당근이 있습니다. 당근을 절이고 고춧가루와 식초, 마늘 향을 입힌 기름 등으로 무친 일종의 김치에요.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에도 당연 한국식 당근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에는 없죠. 하지만 한국’식’ 당근이니까요 괜찮지 않을까요? 저는 한국식 당근보다는 평양냉면이란 말에 늘 불만이 있어요. 평양식 냉면이라고 한다면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일 텐데 평양냉면이라고 하면 으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설에도 저는 평양냉면과 한국식 당근과 똑같은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요. 아재문학이라고 했지만, 아재문학에 이런 소설은 좀 과분한 면이 있죠. 아재식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어떤 점이 우주 저 편에서 꽃뱀에게 물린.Ssul을 아재문학과 비슷하게 만들까요? 그리고 어떤 점 때문에 아니 그래도 아재문학과는 다르죠 쑺 하게 만들까요?
일단 아재문학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아재문학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자기 연민을 꼽고 싶어요. ‘나’ 는 결단코 잘못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나’ 가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이 큰 사회라는 톱니바퀴에서 마모되는 일종의 피해자기 때문이에요. 세상이 잘못된 것이지 ‘나’ 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이 썰은 그 아재문학의 특징을 잘 살려냈습니다. 내가 묘사하는 나는 피해자입니다. 성기는 복구 불가능하게 불타버렸고 우주적 망신을 당했죠. 그 까닭은 꽃뱀에게 물렸기 때문입니다. 꽃뱀이란 표현은 이 만남에 어떠한 음모가 있었음을 시사하는데, 자신을 좀 더 피해자처럼 보이게 해 주는 효과가 있죠.
서두에 길게 이게 아재문학이 아닌, 아재식 문학이라고 쓴 까닭은 작가가 이입하기 위해 쓴 글 아닙니다 라고 코멘트를 달아놓은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당연히 이자는 피해자가 아닙니다. 명백한 가해자죠.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다치게 한 사람이 나도 손가락 골절을 당했으니 피해자라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얼마나 공허할까요.
그러나 이런 가해 사실을 무시한 체 작중 화자는 당당하게, 무고한 자를 꽃뱀으로 만들어서라도 자신을 피해자라 말합니다. 여기서 아재문학의 또 다른 특징을 추출할 수 있는데, 바로 섹스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왜 이렇게 섹스에 집착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는 금기에 도전하는 것이고, 섹스는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것조차 금기처럼 작용하기 때문에 섹스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 금기에 도전한 것이 되고 그렇기에 그게 예술이 된다는 해석을 본 적이 있고, 혹은 반영론적 입장에서 한국의 미소지니 환경에서 살아온 작가의 삶이 그대로 소설에 반영된 것이란 관점이 있겠네요. 어떤 이유를 대든 아재문학은 섹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지니고 있고, 보통은 그 관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살아온 나에게 섹스는 당연히 받아 마땅할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추에 깔린 것처럼 보여요. 남자는 누구나 섹스를 원한다. 남자는 짐승이다. 이런 맨박스에 스스로를 가둔 다음에 섹스를 못 했으니 되려 나야말로 피해자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차치하고서요.
이러한 맨박스-즉 가부장제는 고전적인 질서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질서가 당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이 우주로 나가는 현대에 이런 규칙을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죠. 전통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전통으로 남은 것일 뿐이며 현재와 맞지 않는 전통이라면 폐기해야겠죠.
종합해 보면, 아재 문학이란 ‘섹스를 하지 못한 내가 너무 불쌍해’를 길게 풀어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주 저 편에서 꽃뱀에게 물린.Ssul은 이에 완벽하게 부합하죠. 그러나 진심으로 불쌍해하는 대신에 뭐? 이게 불쌍하다고? 허 참나. 의 정서가 더 진하기 때문에 아재문학과는 구분되는 아재식 문학이겠죠. 이 썰은 물론 있을법하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설마 나에 이입해서 진한 연민을 느끼진 않았을 거라 믿어요.
작가의 다른 작품인 뺑덕어멈 수난기에서 저는 이러한 아재문학의 향기를 진하게 느꼈어요. 주인공이자 화자인 배인덕은 여성입니다. 그러나 이 폐쇄된 좁은 사회의 논리를 그대로 내제화한 인물이기도 하죠. 이것이 일종의 명예 남성 처럼 느껴졌어요. 이 좁은 사회는 참으로 죄많은 곳입니다. 그러나 배인덕은 자신의 죄악을 마주하는 대신에 ‘미친년’을 욕해요. 세상에 그 ‘미친년’ 만 없었다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을 일에 사사건건 트집 잡는 그것만 없었더라면 오늘도 무사하고 평화로운 나의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미친년에게 물려버린 내가 너무 불쌍해. 어쩌면 우리 직장 미친년.ssul 이라고 해서 네이트판에 올릴지도 모를 일이에요.
여기서 느껴지는 건 역시 진한 자기연민이죠. 이게 과거의 이야기라면, 어쩌면 맞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네이버 웹툰에서 다시 연재된 검정 고무신의 뒷이야기를 봤어요. 시대정신을 반영한, 약간은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내용을요. 시대는 발전하고, 우리도 발전하고 과거의 역사는 때론 묻어버리고 싶은, 떨쳐내야 할 뭔가가 되어버린 거죠.
배인덕이, 그리고 계장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리뷰에 초반부에 썼듯이, ‘나’는 결코 잘못하지 않았어요. 순수한 피해자 말고는 다른 게 될 수 없어요. 게임에서 죽은 아이가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는 그 말을 좋아해요.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어요.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여 개선하지 않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뭐가 될 수 있을까요?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이 될 수 있겠죠.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면 더 나은 사람은 결코 될 수 없을 거예요.
소설을 조금만 편집하면, 이것은 자기연민을 위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미친년’ 이 당한 일을 좀 더 줄이고, 그가 당한 폭력은 적절히 편집해 마치 누구나 견딜 수 있는 통과의례인 양 굴 거에요. 심지어 그 고발조차도 문화적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실수나, 통과의례에 실패한 외부인의 질시로 바꿔놓겠죠. 과거의 몇몇 문학은 이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현대의 일부 언론들도요. 그러나 이 소설은 호러고,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죠. 만약에 이것이 실화라면 우리는 사람이 변한다고 믿기에 이들을 교도소로 보내 교화할 것입니다. 연민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요? 약간은요. 그러나 단호하게 지금은 21세기며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줘야 하겠죠.
기존의 몇몇 소설에서 그저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시대는 계속해서 발전해 왔어요. 한때는 주류 문학이었던 것을 이제는 아재문학이라 부릅니다. 경멸과 약간의 조소를 담아.
그러니 우주에서 꽃뱀에게 물린 썰을 읽읍시다. 그리고 뺑덕어멈 수난기를 읽읍시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 연민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아니 약간은 읽어낼 수 있지만, 다른 무수한 감정들을 느낍니다. 그것이 우리를 22세기로 데려다 주겠죠. 아니 최소한 21세기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거라 믿어요.